군수사령부의 구두 지침이 불러 올 역선택의 덫
작성일 : 2025.11.09 09:51 수정일 : 2025.11.09 10:04 작성자 : 스파르탄 (외부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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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외국군이 라벨을 '성능 신호'로 활용하는 실태 - 왼쪽부터 미군(규격(MIL-DTL) + Berry 규정 + 브랜드 라벨의 삼중 신호), 영국군(MVP-다습투습-체계에서 GORE-TEX 표기 병행), 일본자위대(ゴアテックス(고어텍스)를 제품명·설명에 명시)의 사례. [사진: 각 외국군의 공식홈페이지에서 캡처] |
육군 군수사령부 일각에서 올해 보급된 레이어링 피복의 GORE-TEX 라벨 제거 지시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내년부터는 전투화 라벨까지 떼라는 압박이 뒤따른다고 한다. 공문도 없이 구두로 업체를 흔드는 행태 자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라벨’이 가진 품질 신호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은 조치가 군 조달 생태계 전체의 신뢰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
라벨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 성능 신뢰의 ‘시장 언어’
라벨은 단순한 상표가 아니다. 세 가지 기능을 갖는다. 첫째, 성능 신뢰의 신호다. 사용자는 라벨을 보고 원재료의 물성, 공정 수준, 사후 검증 체계를 한눈에 인식한다. 둘째, 추적성과 책임성의 매개다. 라벨은 어떤 막(membrane), 어떤 심실(Seam Tape), 어떤 표준으로 제작됐는지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셋째, 사용자 보호 장치다. 야전에서 누수나 발수 불량이 발생하면, 라벨이 부착된 제품은 로트 단위로 추적해 리콜과 개선이 가능하다.
라벨이 사라지면 정보 비대칭이 생긴다. 겉보기로 구분되지 않는 제품들 사이에서 사용자는 ‘싼 것이 비싸다’를 경험하게 된다. 조달은 ‘동일 규격’이라는 명분 아래 최저가 입찰로 쏠리고, 공급자는 저성능 소재로 바꿔치기할 유인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다. 신호가 사라진 시장에서 질 좋은 제품은 퇴출되고, 저품질이 살아남는다.
라벨 제거가 불러 올 연쇄 효과
라벨이 사라지면 첫째로 성능의 하향 평준화가 일어난다. 라벨이 없으면 ‘같아 보이는’ 제품끼리 가격 경쟁이 벌어진다. 원가의 60~80%를 차지하는 소재와 공정에서 비용을 줄이는 것이 가장 쉽다. 단기 예산은 감소하지만, 누수·결로·동상·훈련 중지 등으로 인한 야전 비용은 폭증한다. 결국 총소유비용(TCO)은 더 커진다.
둘째로 예가(豫價)의 하락과 악순환이 나타난다. 올해 ‘라벨 없는 저가 낙찰’이 늘면 내년도 예가가 낮아진다. 다시 저가 낙찰이 반복되고, 생산자는 ‘치킨게임’식 생존 경쟁으로 내몰린다.
셋째로 중국산 저가 소재의 구조적 득세가 뒤따른다. 라벨은 글로벌 소재사의 공급망 규율을 군 조달 체계에 연결하는 장치다. 이 장치가 사라지면 규율은 약화되고, 검증되지 않은 수입 소재가 파고든다. 손해는 장병과 국내 산업이 떠안는다.
넷째로 전투화에서 이미 겪은 실패가 재현된다. 신호 약화 → 성능 저하 → 예가 하락 → 저가 소재 확산의 경로는 전투화 조달 과정에서 이미 확인됐다. 라벨 제거는 과거 실패를 반복하는 회귀다.
외국군은 라벨을 ‘신뢰의 언어’로 활용한다.
주요 외국 군대는 라벨을 단순한 상표가 아닌 품질과 추적성의 신호 체계로 활용한다. 미군은 ‘MIL-DTL 규격 + Berry 규정 + 브랜드 라벨’이라는 삼중 구조를 갖는다. 예를 들어, APECS(비·한랭 기상용 외피)는 “GORE-TEX® 원단”, “MIL-DTL-32157 준수”, “Berry Compliant(미국 생산)”을 함께 표기한다. 전투화도 NSN(나토 물자번호)와 “GORE-TEX 배리어”를 함께 명시해 착용자와 감사기관이 성능과 공급망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영국군은 MVP(모이스처 베이퍼 퍼미어블) 개념 아래 “GORE-TEX MVP 3-layer”를 표기한다. 독일 연방군은 ‘Nässeschutz’ 자켓에 “ePTFE (Gore-Tex)”를 명기하며, 일본 자위대는 제품명에 “ゴアテックス(고어텍스)”를 직접 넣는다. 이들은 모두 규격 충족(객관성)·브랜드 라벨(추적성)·원산지 규정(책임성)을 결합해 보이는 품질 신호 체계를 구축했다. 라벨은 그중에서도 현장에서 사용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전방의 신뢰 장치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이 문제의 근본에는 평가지표의 오류와 조직 기억의 단절이 있다. 단년도 단가 절감이 성과로 포장되고, 야전 성능·내구·A/S율 같은 질적 지표는 배제된다. 담당자는 바뀌고, 실패의 교훈은 제도화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해충돌 의혹을 부르는 환경이 결합된다. 신호가 사라진 불투명한 시장에서는 ‘누가 이익을 보나’라는 불필요한 의심이 생기고, 불신은 제도를 더욱 왜곡한다.
“라벨 아웃”이 아니라 “성능 인”으로
해법은 단순하다. 라벨을 없애지 말고, 더 똑똑하게 사용하면 된다.
성능기반 규격(PBSA)을 적용해 방수·투습·내구·세탁 내성 같은 핵심 지표를 수치로 고정하고, 납품 시 제3자 시험과 랜덤 검증을 의무화해야 한다. 라벨을 QR 기반 디지털 패스포트로 전환하면, 소재·공정·시험성적이 한눈에 연결된다. 예가 산정에는 품질지수를 반영해야 한다. 하자율, 야전 피드백, 내구시험 결과를 가중치화해 가격모델에 반영하면, ‘싼 저품질’이 ‘비싼 총비용’을 낳는 구조를 막을 수 있다.
또한 현장 클레임의 조기경보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정비·보급 단계에서 즉시 이상 징후를 포착하고 공급망에 환류시키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국산 고기능 소재의 스펙-인 경로를 열어야 한다. 라벨은 독점의 표식이 아니라 성능 검증의 신호다. 동등한 성능을 입증한 국산 소재는 같은 신호 체계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보호가 아니라 경쟁을 통한 품질 상향이 목표다.
결론-라벨을 떼면, 책임도 함께 떨어진다.
라벨은 상표가 아니라 책임의 표식이다. 신뢰는 보이는 규율에서 자란다. 라벨을 떼는 순간, 사용자는 성능을 확인할 권리를 잃고, 생산자는 최저가 경쟁으로 내몰리며, 조달은 불투명과 저품질의 악순환에 갇힌다. 이익을 보는 쪽은 오직 저가 수입 소재 공급망뿐이다.
군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라벨 아웃’이 아니라 ‘성능 인’이다. 성능을 수치로 고정하고, 신호와 추적성을 강화하며, 품질을 조달 모델에 반영해야 한다. 그것이 장병의 생존성과 작전 지속성을 지키는 길이다. GORE-TEX 라벨은 단순한 브랜드가 아니라, 보이는 약속이다. 이 약속을 지키는 조직이 진짜로 강하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다음의 링크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스파르탄의 기고문을 모둠으로 제공합니다]
Ⅰ. 군사 인플루언서 제언
① 군내 사제용품 사용과 개인의 전투효율성 ② 소리 없는 전쟁, 한국군이 준비해야 할 미래 전장
③ 우리 군의 미래 계급구조 재설계 방향 ④ 전투현장의 무시된 이슈, 피아식별
⑤ 군인의 제2막, 양(量)이 아닌 질(質)로 설계하라
⑥ 미군 특수전의 시스템에서 배우는 ‘한국 특수전’의 길(上), (下)
Ⅱ. [스파르탄의 MILOVATION Issue] 전투원 생존 프로젝트
① Protection이 왜 중요한가? ② 방탄헬멧(1) 방탄헬멧(2) ③ 아이프로텍션(1) 아이프로텍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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