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은 아직 ‘밀스펙 이전’에 있다
작성일 : 2026.05.14 08:28 수정일 : 2026.05.14 08:34 작성자 : 스파르탄 (외부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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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한과 진흙, 피로 속에서 장병은 장비의 성능을 몸으로 검증한다. 군사요구도는 문서가 아니라 실제 임무환경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AI 생성 이미지(ChatGPT 활용 제작)] |
“밀스펙의 종언”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는 조금 다르게 읽혀야 한다.
미국에서 밀스펙의 종언은 낡은 규격 중심 조달에서 성능 중심 조달로 넘어가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말은 훨씬 불편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밀스펙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규격은 있지만 기준은 약하다. 시험은 있지만 임무와 연결되지 않는다. 요구도는 있지만 현장성이 부족하다. 외주용역은 있지만 책임지는 전문가는 드물다. 자료는 넘치는데 판단은 빈약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투화다.
전투화의 요구도는 단순히 방수 여부나 가죽 두께, 밑창 강도만으로 끝날 수 없다. 한국군 장병이 실제 어떤 지형을 걷는지, 얼마나 오래 착용하는지, 장마철과 혹한기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행군 후 피로도가 어떤지까지 봐야 한다. 밑창이 젖은 암반과 진흙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장시간 착용 시 발열과 습기는 어떤지, 반복 세탁과 마모 이후 성능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중요하다.
피복 역시 마찬가지다. 방한복은 단순히 두껍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움직일 때 땀이 차고 멈추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진다면 오히려 전투 지속능력을 약화시킨다. 우의도 비만 막으면 끝나는 장비가 아니다. 내부 습기와 열을 배출하지 못하면 결국 안에서 젖는다. 난연복 역시 단순 소재 문제가 아니다. 전차 승무원과 포병, 항공 분야, 특수전 임무군은 위험환경 자체가 서로 다르다.
핵심은 단순하다.
좋은 소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먼저 정의하고 그 임무에 필요한 성능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주용역으로 군사 전문성을 대체할 수 없다
현재 한국군의 전력지원체계는 종종 외주용역이 전문성을 대신하는 구조로 흘러간다.
물론 외부 전문가의 도움은 필요하다. 군 내부가 모든 기술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외주용역은 어디까지나 보조수단이어야 한다. 요구도의 주인은 군이어야 한다. 군이 임무를 알고, 위협을 알고, 사용자 불편을 알고, 보급 현실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군은 “용역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고 말하고, 용역기관은 “군이 준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책임은 서로에게 미뤄진다.
그러는 사이 장병은 그 장비를 실제로 사용한다.
요구도 작성자는 장비를 신고 행군하지 않는다. 시험평가자는 장기간 운용하지 않는다. 계약 담당자는 납품 이후의 불편을 체감하지 않는다. 외주기관은 보고서 제출로 역할이 끝난다. 그러나 장병은 다르다. 그 장비를 신고 걷고, 입고 경계근무를 서고, 메고 훈련하며, 실제 작전을 수행한다.
따라서 군사요구도는 책상 위 문서가 아니라 사용자의 몸에서 검증되는 기준이어야 한다.
이제 기준을 다시 써야 한다
지금 한국군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현실적인 정비다.
첫째, 요구도 작성 능력을 군 내부에 다시 세워야 한다. 외주용역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군이 주도하고 외부 전문가는 보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미군 자료 번역식 요구도를 버려야 한다. 미군 사례는 참고자료일 뿐 정답지가 아니다. 한국군의 지형과 기후, 병력구조와 복무환경을 반영해야 한다.
셋째, 시험평가를 문서 중심에서 사용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시험성적서보다 실제 착용자 피드백과 장기 운용 데이터, 피로도와 정비성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
넷째, 중국산 저가품과 단순 가격경쟁의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 가격만 누르면 시장은 결국 낮은 수준으로 수렴한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장병이다.
다섯째, 기술보호와 공급망 관리 역시 요구도 단계부터 포함해야 한다. 이제 조달은 단순 구매가 아니라 안보 행위에 가깝다.
결국 밀스펙의 종언은 “군용 규격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진짜 기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문서상 통과하는 기준이 아니라 야전에서 작동하는 기준. 미군 자료를 베낀 기준이 아니라 한국군의 임무와 지형, 계절에 맞는 기준. 외주용역 보고서의 표현이 아니라 사용자의 몸으로 검증되는 기준 말이다.
밀스펙이라는 이름에 기대는 군대는 오래 갈 수 없다.
한국군이 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한국군의 임무환경에 맞는 성능기반 요구도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밀스펙의 시작이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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