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대 왕이자 대한민국 오늘날 문화의 기초를 다진 왕, 처음 왕릉 터는 지금의 헌․인릉 좌측 부근이었으나 풍수지리 주장에 따라 현재의 여주 영릉(英陵)으로 -
작성일 : 2026.04.23 10:35 수정일 : 2026.04.23 10:57 작성자 : kangsabin1, 주신혜 (kangsabin1@newssisun.com)
![]() |
| 경기도 여주시의 세종대왕릉(영릉) 모습 |
■ 여주 영릉의 모습
![]() |
| 여주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과 효종 능인 영릉이 함께 안내되어 있다. 왼쪽 봉우리에 세종대왕릉 |
세종대왕릉은 ‘영릉(英陵)’이라고 하여 왕비 소헌왕후와 합장하여 현재 여주시 세종대왕면에 위치해 있다. 이곳 여주 영릉에는 두 개의 영릉이 존재하는데,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다. 두 영릉 모두 차음에는 다른 곳에 있다가 풍수지리나 다른 연유에 의해 옮겨지게 되었다.
세종의 영능은 다음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애환 많은 가족사가 묘자리의 문제로 비화되어서 천묘하였고, 효종의 영능은 처음 건원릉(태조의 능으로 동구릉에 있음) 옆에 봉분하였으나 처음부터 부실하여 계속 고치는 와중에 석실에 물이 샌다는 지관의 말에 현재의 자리로 천묘(1673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여주 영릉의 모습과 이전의 사연
![]() |
| 세종대왕릉의 재실 모습 |
세종은 조선의 500년 치세를 위한 기초를 다지고 본인도 당시의 기준으로는 54세까지 장수를 누린 왕이지만, 가족사의 관점에서는 형제 자매들이 요절하고, 자식들이 일찍 죽거나 후손인 단종이 유배 과정에서 죽게 되는 등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세종은 즉위년 부터 영의정 심온(왕의 장인에 해당)이 정치적 이유로 죽게 되고, 1424년(세종 6)에 맏딸 정소공주(貞昭公主)를 잃었으며, 1444년(세종 26) 12월에는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이, 한 달 후인 1445년 1월에는 일곱 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연달아 서거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446년) 4월에는 왕비 소헌왕후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대를 이은 문종은 즉위 2년만에 요절하였으며, 문종의 아들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쫓겨 난 후 16세에 사망하였고, 단종을 이은 세조 역시 첫째 아들(의경세자)을 일찍이 보내는 등 가족사에 애환이 끊이지 않자 능묘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끝없이 돌았다. 그러나 세조 치세 동안에는 드러내 놓고 천묘(遷墓) 논의를 못하다가 예종 즉위 다음해(1469년)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오늘날의 여주에 능을 쓰게 되었다.
■ 세종의 즉위와 정치, 문화적 업적
![]() |
| 세종의 출생지임을 알리는 서촌 부근의 표지석 |
세종대왕은 현재 경복궁 서쪽, 당시 서촌이었던 통의동, 창성동 부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한다. 현재 사저의 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서저 터로 추측되는 곳에 표지석이 남아 있다(사진 참조). 재위 32년간(1418-1450), 다양한 쉼 없는 업적을 통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토 확정과 민족 문화의 토대를 구축한 세종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는 명실공히 ‘대왕’이라 불러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오늘날 한글의 모태를 이루고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토인 한반도 경계 확정(4군6진 개척), 각종 과학기기의 발명과 토지제도와 세제를 확립하고, 대마도 정벌을 통하여 정국을 안정시킨 점에서 문과 무를 아우르고 애민 정신에 투철한 진정한 왕이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누구나 대왕이라는 호칭에 토를 달지 않을 만큼의 업적과 영향을 미친 임금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종대왕의 탄신일(5.15)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기리고 있다.
![]() |
| 세종대왕릉 안에 전시되어 있는 과학기술 발명품의 모습 |
이번 주의 시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