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최진석이 노자의 도덕경을 현대 철학 사조인 관계론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성일 : 2026.04.01 07:25 수정일 : 2026.04.01 10:47 작성자 : 에디터 박세미
최진석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읽고
철학적 문구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는 시대별로 상황에 맞게 그 의미가 변해 왔다. 원래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새겨져 있었고, 소크라테스가 앎을 설득하기 위해 강조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지금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경구다.
당초 신전의 문구는 인간 너희들은 신이 아니니 신탁에 순응하라는 뜻이었다. 뒤이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오늘날에는 더 심리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로 확장됐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를 탐구하여 나의 감정, 욕망, 가치관 등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라는 의미로 통하고 있다.
이렇듯 같은 철학적 문구이지만 시대별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맥락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최진석은 그의 저서 도덕경 서론에서 의미심장한 의문을 제기하고 맥락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우리가 보통 노자의 도덕경을 읽을 때,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노자가 아닌 6∼700여 년 후인 위진(魏晋) 시대의 왕필(王弼)의 노자주를 펼쳐 놓고 본다.
그렇다면 왜 위진 시대의 왕필과 노자 사이에 있는 먼 거리를 고려하지 않는 걸까? 노자와 왕필을 시대초월의 보편적 지평 안에다 같이 놓고 서로 긴밀히 소통시키는 접근이 무척 이상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온 도덕경은 왕필 등에 의해서 한 꺼풀이 덧 칠되어 씌여진 것이었다. 도덕경에 관한 기존의 번역서나 연구서들이 기본 텍스트로 삼았던 것은 대부분 위진 시대의 왕필이 주석을 단 왕필본의 도덕경이었다. 하지만 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으로 700년 전이다. 두 시대 사이에는 너무 큰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1993년 호북성(湖北省) 형문시(荊門市)에서 나온 죽간본(竹簡本: 전국시대로 추정), 그리고 1973년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굴된 비단에 쓰여진 백서본(帛書本: 한나라 초기로 추정)이 발굴되었다.
최진석은 이를 검토하여 노자의 원래 목소리와 의도에 가장 합치되는 정본을 다시 구성하려고 했다.
이러한 노력은 선진국형 학자가 가야 할 길이고 본받아 마땅하다. 원전(原典)을 바탕으로 자기 의견을 내놓는 지식 생산자로서 자세임에 틀림없다. 남이 해석해 놓은 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 이 땅에 지식 수입자는 설 자리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최진석이 노자의 도덕경을 현대 철학 사조인 관계론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철학을 본질론ㆍ실체론이라고 한다면, 현대철학은 관계론(關係論)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반야지혜가 현대 관계론적 접근의 대표적 모형이다. 무아론(無我論)과 무상론(無常論)이 이에 해당된다. 무아는 나 자신에게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변하는 것들의 집합체일 뿐 고정된 나는 없다는 의미이다. 무상은 모든 것은 과정일 뿐 고정된 상태는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자동차는 2만여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진축, 샤프트, 바퀴, 핸들 등 무수히 많은 부품들이 있다. 이들 부품들을 단순히 늘어만 놓으면 거기에는 자동차는 없다. 이 부품들을 설계도에 따라 배열하면 비로소 자동차가 된다. 이렇듯 자동차는 실체가 아니고 여러가지 관계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현대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가 더 깊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제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 非常名: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이것이 최진석의 번역이다. 도를 정의 내리면 혹은 도라고 부르면, 그것이 도의 한 측면은 되겠지만 도의 진면목이나 전체 면모는 아니다. 세계 자체가 본질을 규정하는 방식의 언어행위로 구분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계의 어느 것이나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한다고 본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2장) 有無相生: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주고,
難易相成 , 長短相較 , 高下相傾 ,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뤄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니, 세계는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유무상생은 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 有가 有인 이유는 有자체 때문이 아니고 無때문에 즉 無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有가 되고, 똑같이 無도 無자체 때문에 無인 것이 아니라 有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無가 된다는 것이다. 有와 無가 꽈배기처럼 서로 끌어안고 서로 꼬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론적 사고이고 맥락주의적 사유이다.
2700여년 전에 현대철학적 사유 방식과 비슷하게 세상의 도(道)를 설파했던 노자는 최진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미래 사회는 지금과는 다르게 집중이나 통일보다는 분산된 정치사회로, 소품종 대량생산보다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경제구조로, 중앙집권보다는 지방분권의 행정체제로, 추상적인 이성적 본질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관계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노자가 자연(自然)의 ‘스스로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며 후대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새로운 문명 전환의 희망을 노자의 도덕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한 번쯤 이 번잡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의 끝없는 욕망을 잠시 뒤로하고, 노자가 들려주는 길(道)과 자연의 노래에 귀 기울여 보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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