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안보에서 포괄안보로, 그러나 공론은 뒤따르지 못했다
작성일 : 2026.03.19 09:20 수정일 : 2026.03.19 09:25 작성자 : 백자성 (100j-star@newssi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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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적 국경을 넘어 기술과 정보의 영역으로 확장된 안보, 그러나 그 기준과 한계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미지 생성: ChatGPT] |
2026년 2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형법 제98조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간첩법’이 개정되었다. 그러나 이 중대한 변화는 사회적으로 거의 인식되지 못한 채 조용히 통과되었다. 기술 유출과 외국 연계 정보활동이 국가안보의 핵심 위험으로 부상해 온 현실을 고려할 때, 이번 개정은 결코 가벼운 변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공론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 법이 안고 있는 첫 번째 문제다.
이번 개정의 핵심은 단순한 적용 범위의 확장이 아니다. 기존 형법은 ‘적국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한 경우’를 처벌하는 구조였으나, 개정을 통해 그 대상을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장하였다. 이에 따라 간첩행위는 특정 국가를 전제로 한 행위가 아니라, 외국과의 연계를 통해 국가의 안전이나 이익을 침해하는 정보의 탐지·수집·누설 행위 전반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는 특정 국가를 중심으로 한 ‘대상 중심 안보법’에서 위험 행위 자체를 규율하는 ‘행위 중심 안보법’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축적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동안 외국과 연계된 군사기밀 유출 사건은 일반 형사범죄로 처리되거나, 반도체 등 국가핵심기술 유출 역시 경제범죄의 범주에 머물러 왔다. 군사시설 촬영이나 전략적 정보 수집 행위가 명백한 안보 위협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형사법 체계는 이를 충분히 포섭하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이미 안보 위협의 양상이 변화하고 있었지만, 법은 이를 뒤따라가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이번 개정은 한국 안보 개념의 전환을 제도적으로 명문화한 사건이라 평가할 수 있다. 즉, 군사 영역에 한정된 전통적 안보에서 벗어나, 기술·산업·정보 영역이 결합된 ‘포괄안보’ 체계를 형사법 질서에 포함시킨 것이다. 오늘날 안보는 더 이상 전장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반도체 공정, 데이터 흐름, 연구개발 협력의 경로 역시 안보의 핵심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개정의 필요성이 곧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라는 규정은 해석의 폭이 넓어 적용 범위의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형벌법규는 명확성 원칙(principle of legality)을 충족해야 하며, 기본권 제한은 과잉금지 원칙(principle of proportionality)에 부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추상적 개념이 광범위하게 적용될 경우, 해외 연구기관과의 협력이나 국제적 시민사회 활동까지 잠재적 수사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는 정당한 국제 교류를 위축시키고, 학문·표현의 자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 우려되는 지점은 이러한 중대한 법 개정이 충분한 사회적 논쟁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술안보 이슈는 높은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중적 의제로 확장되기 어렵고, 동시에 안보 프레임은 비판적 토론 자체를 위축시키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정치권의 의제 경쟁까지 더해지면서, 입법 과정은 형식적으로는 공개되었지만 실질적인 공론의 장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언론 역시 법 개정 사실 자체의 전달에 머물렀을 뿐, 법적·정책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번 간첩법 개정은 한국 사회가 군사 중심 안보에서 포괄안보 체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러나 법의 변화가 곧 안보 역량의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법이 어떤 기준과 통제 속에서 해석되고 집행되는가이다. 정치적 프레임을 넘어선 안정적인 정보 역량, 그리고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안보와 자유라는 두 가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조용히 통과된 법일수록, 더 큰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정의 찬반을 넘어, 우리가 어떤 안보 체계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성숙한 공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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