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화된 경쟁이 국제질서와 한국 안보에 던지는 질문
작성일 : 2026.02.13 09:30 수정일 : 2026.02.13 09:42 작성자 : 백자성 (100j-star@newssi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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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reign Affairs |
최근 Foreign Affairs 2026년 3·4월호에 David M. Lampton과 Wang Jisi가 공동으로 「America and China at the Edge of Ruin」을 발표했다. 저자들은 미·중 갈등을 흔한 패권 경쟁 분석이 아닌, 힘의 이동에 더해 양국 내부 정치와 관료 시스템, 위협 인식이 결합된 ‘자동화된 적대 경로’로 설명한다. 경쟁이 정책 선택이 아니라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는 진단은, 기존 미·중 관계를 다뤄온 많은 논의와 구별되는 문제 제기다.
저자들이 포착한 현재의 미·중 관계는 ‘신중한 관여’에서 ‘상호 강화된 적대’로 이동한 상태다. 양국은 서로를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체제적 위협으로 인식하며, 이 인식이 군사 계획, 기술 통제, 동맹 구조, 공공외교 전반에 내재화되었다. 그 결과 억지는 강화되고 불신은 제도화되었으며, 정책은 장기적 적대성을 전제로 자동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이 글은 특히 전면전보다 ‘관리된 적대’의 고착을 더 큰 위험으로 본다. 전쟁은 없지만 군비 경쟁과 시장 분절, 제도 마비가 지속되는 상태다. 경제와 기술은 안정 요인이 아니라 취약성으로 인식되고, 수출 통제와 산업 정책, 공급망 재편이 국가안보의 언어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흐름은 기후, 금융, 팬데믹 같은 공동 과제를 주변화하며 국제 시스템 전체의 회복력을 약화시킨다.
동시에 저자들은 이 경로가 불가역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과거의 관여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전제로 하되 상호 존재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정상화’를 제안한다. 대만 해협의 긴장 완화, 군사 소통 복원, 관세와 기술 규제의 조정, 인적 교류 회복 같은 실무적 조치들이 축적될 때만이 오판의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핵심은 상대의 의도가 아니라 정책 시스템 자체를 조정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 미·중 논의와 여러 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많은 분석이 중국의 공세성이나 미국의 봉쇄 전략 중 하나에 책임을 귀속시켰다면, 이 글은 양국 모두를 내부 정치의 제약 속에 놓인 행위자로 본다. 또한 ‘관리 가능한 경쟁’이라는 낙관을 경계하며, 상호의존이 무기화된 현실을 전면에 놓는다. 경쟁의 원인을 상대 국가의 의도보다 상호작용하는 제도와 인식의 구조에서 찾는 점이 특징적이다.
국제정치이론 측면에서 이 글은 권력이행과 공격적 현실주의의 통찰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국내 정치와 관료 시스템이 구조적 경쟁을 증폭시킨다는 점을 추가한다. 고전적 안보 딜레마는 군사 영역에 머물렀지만, 여기서는 기술·경제·규범까지 포함한 다차원 딜레마로 확장된다. 복합상호의존은 안정 장치가 아니라 취약성으로 전환되고, 헤게모니 안정론은 질서 공급자의 부재라는 공백 국면으로 재해석된다.
이들이 제기한 구조적 문제는 국제정치 전반에도 함의를 갖는다. 이러한 구조가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경쟁은 단일 전장이 아니라 전사회적 전선이 되고, 중견국의 전략 공간은 축소된다. 국가는 의도와 무관하게 공급망의 노드, 동맹의 전진 거점, 규범 경쟁의 시험장으로 배치된다. 전쟁이 없더라도 긴장은 상시화되고 비용은 누적되며, 이는 글로벌 성장 둔화와 제도 신뢰 약화로 이어진다.
이 흐름은 한국 안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반도체와 AI, 방산과 우주 같은 산업 영역이 곧 안보 자산이 되는 환경에서, 산업 정책과 외교 선택은 즉각 전략적 의미를 띤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변화를 종합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위협 평가는 동맹에, 시장 전망은 중국에, 기술 방향은 국제 규칙에 의존하는 ‘판단의 외주화’가 반복되고, 안보·산업·외교는 여전히 분절적으로 작동한다.
더 근본적인 취약성은 국가 전략의 내용과 방식에 있다. 포괄안보 차원의 대전략이 부재하고, 자유주의 질서나 민족 부흥처럼 정책을 관통하는 장기 서사도 희미하다. 위기 관리에는 능숙하지만 방향 설정에는 취약한 전략문화가 지속된다. 중재자나 완충자를 자임할수록 실제 영향력은 줄어들고, 특정 진영의 기능적 구성요소로 흡수될 가능성은 커진다. 여기에 국내 정치 중심의 단기 의사결정이 겹치며, 핵심 사안조차 부처별·사안별 대응으로 분산된다. 이런 조건에서는 전략적 선택지가 좁아지고, 선택의 비용은 커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외교의 수사가 아니라 전략 체계의 재설계다. 안보–산업–기술–외교를 통합하는 포괄안보형 국가 전략, 이를 조정할 실질적 컨트롤 타워, 그리고 한국이 어떤 전략 국가가 될 것인지에 대한 장기 기준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미·중 경쟁이라는 외부 구조가 한국의 선택을 대신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대응을 늘리는 시간이 아니라, 판단을 회수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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