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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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이제 헌정의 언어로 말할 때다.

군(軍)은 헌법이 요구하는 정치적 중립의무와 헌법 및 계엄법에 기초한 제도적 의무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다.

작성일 : 2025.11.26 10:24 수정일 : 2025.11.26 10:37 작성자 : 백자성 (100j-star@newssisun.com)

1961년 알제리 전쟁기 통행금지령 하의 파리. 국가비상조치가 헌정질서의 내적 긴장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로, 프랑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비상권의 문민통제를 제도화했다.   [사진 = Jacques Boissay / akg-images]
 

   최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군은 계엄훈련을 해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사실진술을 넘어, 헌법 제5조가 요구하는 정치적 중립의무와 헌법 제77조 및 계엄법이 부여하는 제도적 대비의무 사이의 딜레마를 드러낸다. 헌법과 법률이 명시한 바에 따라 군은 계엄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 준비가 정치개입의 신호로 읽힐 수 있다는 역설에 놓여 있다. 여인형의 발언은 결국, 군의 침묵이 무책임이 아니라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자기억제라는 현실을 상징한 것이다.

   12·3 비상계엄사태 이후, 일부 여론은 군을 ‘내란가담조직’으로 규정하며 징계와 포상, 진급심사 반영 등 후속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과연 군의 정치적 중립성 확립이나 문민통제 강화에 본질적으로 기여했는지는 냉정히 따져볼 문제다. 정치적 책임 추궁이 군 조직 내부의 도덕적 혼란과 심리적 위축을 낳고, 법적 판단보다 여론을 더 두려워하게 만든다면 이는 헌정질서의 강화가 아니라 약화다. 군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침묵을 택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 자체가 헌정적 불신의 결과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계엄법은 군이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명시한다. 그러나 이 구조는 군을 헌정질서의 수호자로 만들면서 동시에 정치적 행위자로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평시부터 계엄계획과 훈련을 준비해야 하는 법적 의무가 군 내부에 ‘비상통치의 잠재적 주체’라는 자기인식을 심화시킨다. 헌정질서를 보호하려는 제도가 역설적으로 헌정질서를 긴장시키는 구조적 모순이 여기에 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비상권의 시행주체를 군이 아닌 민간 권력 아래 두는 방향으로 제도를 발전시켜왔다. 프랑스는 1958년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집중시키되, 의회와 헌법위원회의 견제를 받도록 함으로써 군이 독자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제도적으로 차단했다. 독일은 1968년 개정된 ‘방위사태법’을 통해 국회의 승인 아래에서만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군은 외부 방위를 위한 보조적 역할에 한정된다. 캐나다는 「비상사태법(Emergencies Act)」을 통해 의회의 통제와 주정부 협의를 의무화하여 군이 아닌 민간행정기구 중심의 대응체계를 구축했고, 일본 역시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의 주체를 정부와 내각 중심으로 설계하고 있다. 이처럼 비상권을 문민통제 아래 두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헌정적 진화가 지향하는 공통된 방향이다.

   이와 비교하면 우리의 헌법과 계엄법은 여전히 냉전기의 잔재를 품고 있다. 비상계엄이 발동되면 군은 행정·사법 기능을 포괄할 수 있고, 계엄사령부는 군 중심으로 편성된다. 이는 문민통제 원칙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예외상태의 상시화’라는 헌정적 위험을 내포한다. 법리적으로는 합헌이나, 제도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진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구조적 한계다. 헌정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지 않는 계엄은 언제든 과거의 그림자를 되살릴 수 있다.

   이 제도가 유지되어온 이유는 한국의 특수한 역사와 안보 현실에 있다. 전쟁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군은 ‘국가수호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해왔다. 북한과의 대치 속에서 계엄은 정치의 수단이 아니라 생존의 장치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사회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헌정질서를 중심 가치로 삼게 되었다. 이 괴리 속에서 계엄은 시대의 과제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현재의 계엄 체계는 헌정질서를 지탱하기보다, 헌정질서를 시험하는 제도로 남아 있다.

   12·3 비상계엄사태 이후의 책임논의에 머무를 때가 아니다. 이제는 계엄의 운영 방식과 통제 구조를 어떻게 선진화할 것인가를 논해야 한다. 계엄의 주체를 군이 아닌 민간통제기구로 전환하고, 국회의 사전통제와 사후감시를 강화하며, 준비 과정의 투명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런 개혁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동시에, 헌법이 지향하는 문민통제를 실질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다. 계엄을 헌정의 언어로 재정의할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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