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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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미래의 경쟁력 한글 1 -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해 알아보자(1).

우리는 지금 한글 덕택에 문명국가, 경제대국으로서 대접을 받으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작성일 : 2025.10.01 04:00 수정일 : 2025.10.01 04:21 작성자 : 에디터 박세미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가?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1).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감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도 한자를 쓰고 있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한글 덕택에 문명국가, 경제대국으로서 대접을 받으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지만, 그동안 한글의 연구는 세계사적 측면에서 보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우리만의 특수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에게는 자기만족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외국인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특수성도 세계사적인 보편성의 틀 안에서 설명될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한글을 신성시하거나 세종대왕을 천재로 영웅시 할 수밖에 없다. 한글 창제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은 외부적 시각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보려고 할 때만 가능해 진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 문자의 발명은 중세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서양 국가들의 경우 라틴어라는 보편적 공통어에 대항하여 나라별로 고유의 민족어가 생겨나면서 지역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다. 동양에서도 일본, 베트남, 한국이 상형문자인 한자를 통한 자국어 표기에 한계를 느끼고 자국 글자를 만들게 된다. 유럽에서는 주로 라틴 Alphabet을 통해 자국어를 표시하였지만, 동양은 한자를 변형하거나, 인도계통의 음운론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자국 문자를 발명한다. 우리 한글이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중앙아시아의 여진, 서하, 몽골, 만주 등 북방민족들이 한자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글자를 만들었다. 베트남은 쯔놈이라는 글자를 만들었고, 일본도 가나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아래의 글자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1.여진, 2.파스파, 3.베트남(쯔놈), 4.몽골, 5.서하, 6.만주, 7.일본문자 )

동아시아 국가의 Alphabet 역할을 했던 한자는 뜻글자이면서 그림(상형)문자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 다른 지역, 다른 문화권에서 각각 다른 말을 사용하는 민족들의 말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만약 한자가 표음문자였다면, 다시 말해 서양의 라틴 Alphabet 같은 기호역할을 했다면, 동아시아의 각 민족이 자기 문자를 만들지 않고 그 글자를 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일찍이 농경사회에서 발전된 문명을 토대로 만들어진 한자어는 고립어의 문법구조를 갖는다. 중국 주변의 북방민족들은 교착어를 갖고 언어생활을 하면서 중국의 한자에 맞서서 투쟁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결국 아시아의 문자를 분류하면 크게 한자와 한자를 변형한 문자, 인도 계통의 문자로 나눌 수 있다. 우리 한글은 인도 계통의 문자라는 주장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세종대왕이 재임할 당시 조선의 지배층은 중국식 국제질서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터널 속에 빠져서 한자만을 고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자를 대신할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한글의 창제 작업을 비밀리에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 산스크리트어(범어)에 밝은 승려인 신미, 수미 등 열 명의 학승과 수양대군, 정의공주 등 아들딸,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이 비밀리에 한글 발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 실록을 토대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글이라고 부르는 글자의 명칭은 본래 훈민정음이었다. 여기서 편의상 훈민정음을 한글로 표기한다.

- (1434) 진주에서 김화라는 자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백성들과 직접적인 문자()를 통한 교화문제를 고민하였다.

- (1436) 정부구조를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어 왕이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 (1437) ‘앙부일구라는 시계를 제작하면서 하층민에게 시간을 알릴 수 있는 시간표시법으로 동물그림을 활용하는 등 백성과의 소통방법을 고민하였다.

- (1438) ‘흠경각이라는 왕실 과학연구소를 통해 과학기술 개발성과를 크게 올렸다.

- (14431230) 한글을 창제하였다.

- (1444216) 한글을 써서 한자발음 사전인 운회를 번역하였다.

- (1444220) 최만리가 한글반대 상소를 올려 논쟁을 벌였다.

- (144517) 몽고 Phagspa문자에 능통한 황찬이 요동에 귀양을 오게 되자, 신숙주 성삼문 등을 보내서 자문을 받았다.

- (144545) 용비어천가를 한글로 지었다.

- (1446929)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반포하였다.

- (14461010) 의금부, 승정원의 공식문서를 한글로 작성토록 하였다.

- (1446118) 언문청을 설치하였다.

- (14461226) 문서담당 하급관리의 시험을 한글로 출제하였다.

- (1447) 수양대군이 최초의 한글 산문책인 석보상절을 간행하였다.

- (1447) 세종대왕이 친히 한글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 (14479) 동국정운을 완성하였다.

- (1448328) 사서를 한글로 번역할 것을 지시하셨다.

- (1449105) 정승을 비판하는 한글벽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기록 외에 남아있는 다른 역사 기록도 있다. 먼저 성현이 1520년대에 지은 용재총화에 한글 관련 기록인 其字體依梵字爲之가 있다. 글자체는 범자에 의지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영산김씨 세보, 세종대왕 곁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던 신미대사가 학사로 임명되어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자음과 모음체계를 설명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세 번째, ‘죽산안씨 대동보정의공주유사조의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정의공주가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 변음토착(變音吐着) 문제를 해결하여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노비 수 백명을 내려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정의공주가 한문으로 표기할 수 없는 조사와 어미를 한글로 표기하여 토를 다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국지어음(國之語音) 이호중국(異乎中國)ᄒᆞ야 여문자(與文字) 불상유통(不相流通)ᄒᆞᆯᄊᆞ 여기서 밑줄 친 것처럼 토를 달아 한문의 가독성을 높이는 방식이 토씨이다. 그런데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ᄒᆞ고 ··爲古, ··이라 ··是羅라고 썼다. 훈독과 음독을 섞어서 썼던 것이다. 이처럼 , 와 같이 훈독으로 토를 다는 것을 변음토착(變音吐着)이라고 하는데, 정의공주가 ᄒᆞ, 로 바꿔서 순수 한글로 토씨를 다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했다.<>

* 다음 회는 훈민정음 언해와 훈민정음 해례본을 근거하여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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