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 한옥 거리는 근현대사의 집약 처라 할 수 있다. 행정동으로는 종로 1,2,3,4가동을 말한다. 익성동은 조선의 행정 단위였던 정선방의 ‘선’과 익동의 ‘익’자를 합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운니동(북), 돈의동(남), 낙원동(서), 와룡동(동)과 이웃 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사연을 품고 있다. 넓게는 위로 창덕궁, 우로 종묘, 그리고 좌로 경복궁
작성일 : 2025.08.18 10:34 수정일 : 2025.08.19 06:20 작성자 : kangsabin1, 주신혜 (kangsabin1@newssi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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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선동 한옥거리 지도 |
■ 운현궁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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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기 풍운의 중심, 운현궁 전경 |
종로 3가역 6번 출구를 나와 낙원 상가를 머리에 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안국역에 이르기 전, 우측 고즈넉한 건물이 운현궁이다(거꾸로 안국역 4번출구에서 내려오면서 방문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익선동 지역(정선방)은 과거 종친 중에서도 촌수가 먼 친척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철종 때 와서 그나마 자신의 옛 집터를 고쳐 형이 살도록 한 것이 오늘날 여러 역사적 흔적의 실마리들이다.
그런 연유로 당시 몰락한 종친인 흥선군의 집이 이곳에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흥선군은 야심가였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을 것을 예측하고, 미리 조대비(풍양 조씨)와 손을 잡고 신속히 옥쇄를 처리하여 흥선군은 그의 차남인 이재황(고종)을 철종의 양자로 들이면서 왕위에 앉히고 섭정이 되었다. 이후 장동 김 씨 일파에게 휘둘리던 왕권을 되찾는 동시에 본인이 꿈꿔왔던 유고 정치를 복원하면서 10년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그의 등장이 과연 대한민국의 역사를 복원한 것인지, 후퇴시킨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많다. 우선 그는 경복궁 복원과 유교 정치의 복원, 서원의 철폐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하였고, 토지·군사 제도 등을 정상화 하는 것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경복궁 중건을 위해 화폐를 남발하고, 외국 세력의 출몰에 대응하여 ‘쇄국정책’을 폈다. 병인양요(1866)와 신민양요(1871)를 거치면서 그러한 견해는 더욱 확고해져서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의 기치를 높였으며 덩달아 천주교 박해도 심했다. 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유로 동학에 대해서도 배척하였다.
왕권 강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 질서를 회복한 것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세계정세의 변화를 읽지 못한 쇄국 정책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평가가 주어지지 않은 것도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며느리 민비(민자홍: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서 소설로서 구현한 것이 소설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이다.
역사의 한페이지에서 권력의 중심이었던 운현궁은 지금은 문화의 전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하지만, 운현궁 내부를 조용한 시점에 걸으면 흥선 대원군이 보이는 듯, 궁이라고 하기에 다소 조심스러운 소박하고 정갈한 궁의 내부를 볼 수 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산 증거가 아닐까.
■ 민족운동의 산실이자 어린이날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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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중앙대교당 사진 |
아이러니 하게도 운현궁 맞은편에는 흥선대원군의 박해를 받았던 동학의 천도교 중앙대교당(1921년 완공)이 수운회관(1971년 완공) 건물과 함께 있다. 동학은 경주 양반인 수운 체제우가 창시한 종교운동이면서 농민운동의 사상적 기반이지만, 3대 손병희 선생에 이르러서는 ‘천도교’로 이름을 개칭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의 본거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손병희 선생은 당시 많은 인재들을 불러 모아 양성했는데, 민족지도자 33인 중 15인이 바로 천도교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 중에 이종일은 1919년 당시에는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보성사는 이용익 선생이 보성학교 교재를 인쇄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었지만,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보관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조계사 터이다) 사장으로서 독립선언서를 인쇄·배부하였고, 황성신문 사장으로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사설을 게재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오세창은 6.10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천도교는 3.1운동(1919)과 순종의 사망을 계기로 일어난 6.10(1926) 만세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21년에 완공된 것으로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건물과 더불어 3대 건축물로 랜드마크 였다고 한다.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나까무라 요시 헤이 작품으로, 그는 덕수궁박물관 건물과 삼청동에 있는 중앙고등학교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로, 삼청동, 정동의 유서 깊은 곳에 건축물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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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대교당 마당에 있는 방전환선생의 어린이 헌장 기념비 |
천도교 중앙 대교당의 마당은 또한 방정환 선생에 의해 세계 최초로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1921년에 천도교소년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고, 이어 1922년에 어린이날을 제정, 1923년에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여 어린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함을 역설한 선각자이다. 그는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서 아동 문학가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3.1운동 후 어린이가 나라의 주인이자 미래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자 한 주인공이다.
■ 민족 교육의 출발지- 교동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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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교육의 요람지, 교동초 옆에 있는 표지석 |
운현궁 아래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소학교인 교동초등학교(1894년 개교)가 130여년의 역사를 함께하면서 이어져온 교육의 산실로 자리하고 있다. 관립으로 설립된 소학교(초등학교)는 이후 모든 지역 소학교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스스로 개화의 노력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 외에도 바로 교동 초등학교 아래에는 근대 종두법의 창시자인 <지석영 선생의 집터>를 비롯한 여러 지사들의 흔적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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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 상가 옆의 지석영 선생의 집터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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