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남경 행궁터를 시작으로 근세조선의 권력 중심지이고 일제 강점기 이후 천재 문인, 화가들의 산실. 본 지에서는 문화탐방 1호 취재지로 서촌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사람, 먹거리, 역사 등 몇 가지 방향에서 탐방하여 싣는다-
작성일 : 2025.06.28 02:58 수정일 : 2025.07.19 11:24 작성자 : kangsabin1 (kangsabin1@newssi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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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촌 먹자 골목의 모습. 밤이되면 더 멋스럽다. |
서촌의 주말은 각양각색의 사람 물결이다. 평일도 별반 차이가 없다. 시간대에 따라 다소 다를 뿐이다. 외국 관광객은 물론이고 주변 북악산(백악산), 안산, 인왕산 등산객들, 각종 전시회나 공연을 보기위해 온 방문객들, 옛 정취를 느끼기 위해 오는 향유객들로 이른바 ‘인산인해’다. 먹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는 소리다. 역사의 항기도 느끼고, 정취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서촌이 조선 시대 이후, 특히 조선 후기 이후 대한민국 인재의 산실인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숨겨진 것은 아니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종로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관광 안내 지도에는 우리 눈에도 익숙한 인물들 생가 터나 거주 흔적을 볼 수 있는 장소가 곳곳에 표시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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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에서 제공하고 있는 서촌 안내 표지판 |
누가 뭐라고 해도 민족의 성군이요, 민족 문화의 백미인 ‘한글’ 창제자이신 세종대왕이 나신 곳이 있다. 집터 자체는 없지만, 추정되는 곳에 세종대왕 탄생지 표시가 있다. 세종대왕은 단순히 일개 군왕이 아니라 조선, 그리고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 문화의 초석을 다진 민족의 어른이기도 하다. ‘한글’은 세계가 인정하는 우수한 과학적 글자요, 소리글자이다. 토지제도, 과학 기술 개발 등 백성들을 위해 정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버지 태종의 역할은 바로 이 세종대왕의 업적을 위한 초석이었다. 세종대왕이 있어 오늘 이글도 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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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촌 도로뵨에 위치하고 있는 세종대왕 집터 표지석 |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조선의 천재 문인들과 화가들이 꿈을 키운 곳이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초기 3대 천재 시인의 집터나 머문 곳이 모두 이곳 서촌과 관련이 깊다. 일제 강점기 이후 3대 천재시인 하면, 이상, 윤동주, 백석을 꼽는다. 그중 이상 시인의 집터가 있고,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터(윤동주 문학관은 좀 더 위에 따로 있다)도 있다. 사실 백석의 서울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야(백석이 붙여준 이름)’ 와 동거한 김영한의 일터도 삼청동 너머 지금의 길상사였음을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연관성이 있다.

이상의 집터는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보도블록을 따라 100여 미터만 올라가면 쇼 윈도우처럼 겉모습을 한 유리 건물이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옛적 조그마한 한옥에 황토벽을 가지고 틈새 창문을 가진 한옥의 옛 정취를 보존하고 있다. 2층에 마련된 옥상같은 곳에서 보면 연이어져 있는 크지 않은 한옥들이 지붕을 이어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절로 이상이 쓴 소설<날개>의 내용에서 연심(실명: 금홍)이 에게 구박받으며 지내는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집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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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집에서 본 <날개> 내용을 떠올리는 옆집 2층 좁은 공간 |
이상은 천재답게 당시는 선구적인 모던하고 아방가르드한 시를 ‘조선일보’에 게재하였다. 첫 번째 오감도의 시 내용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다음의 모습으로 서술되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다른事情은업는 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당시 얼마나 난해하고 의아해 했을지 짐작이 가는 시 표현이다. 독자들이 하도 말이 많아 다 쓰지 못하고 15회 연재로 마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삶과 비슷하다. 천재는 ‘악필이고 단명’이라 했던가. 2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의 삶에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그냥 길게만 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한탄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천재시인 윤동주의 하숙집터는 서촌에서 보면 더 깊숙한 서쪽에 있다. 아마도 연희전문을 다니던 시절이어서 연대에 가까운 곳에서 하숙집을 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출생으로 서촌 출생은 아니지만, 연희전문시절 문학에 뜻을 두고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서촌 문인으로 간주된다. 서촌 위쪽 부근 청운동에 문학관이 마련되어 있다. 가수 윤형주와 6촌 형제간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윤동주 시인도 27살에 요절하였다. 각종 언어, 철학, 문학에 우수한 재질을 발휘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있다. 운동도 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희전문 졸업 즈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시집 발간 계획을 잡았으나, 당시 민족 말살 정책으로 위험에 처하자 그의 육필 원고가 친구 정병욱에 의해 항아리 속에 보관되어 있다가 빛을 보게 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서시> 와 <별 헤는 밤>을 한번쯤 낭송하였을 터이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정갈함과 순수의 시인답게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창씨 개명을 한 자신의 참회를 <참회록>이라는 시로 표현한 것이 그의 삶을 대변한다(원문).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에
내얼골이 남어있는 것은
어느王朝의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懺悔의글을 한줄에 주리자。
― 滿二十四年一介月을
무슨깁븜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어느 즐거운날에
나는 또 한줄의 懺悔錄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웨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 隕石 밑으로 홀로거러가는
슬픈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 온다。
一月二十四日
한 번의 오점이라도 남기고 싶지 않은 시인의 마음이 묻어난다.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자신의 한 점 과오를 닦아내고 싶은 그 마음. 서대문 형무소 차디찬 바닥에서 그렇게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 해방 직전에 생을 마감했다.
현대에 들어 와서 <사슴>의 시인 노천명과 작가 한강도 이곳에서 둥지를 튼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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