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균등은 현재의 여건이나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에 맞추어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런 소극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황이 갖고 있는 불평등 요소들을 조정·지원해서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지도록 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기회균점 정책’이다.
작성일 : 2024.12.03 05:31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우리는 왜 ‘기회균등원칙’에서 ‘기회균점주의’로 가야 하는가?
1) 기회균등 원칙으로 충분한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회균등(equal opportunity)의 원칙에 대해서 알아보자.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여 자유로운 의사 표현의 기회를 부여하고, 모든 국민에게 직업선택의 자유를 인정하여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기회균등은 국민들이 기회를 얻으려고 할 때 인종·성별·가정환경 등 개인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는 요소들로 인하여 어떤 차별도 받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기회균등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다. 선진 국가에서는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펴고 있다. 기회균등의 첫걸음은 교육에서 시작된다. 무엇보다 성별·신분 등 사회계층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누구에게나 보장하고 있다. 교육의 기회균등은 국민 각자에게 그들의 능력을 키울 기회를 제공하는 원칙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재산권 보장과 시장경제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으로는 기회가 고르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회균등의 원칙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제로 갖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회에 있어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회를 결정하는 변수인 정보망, 인맥, 돈줄이 특정 계층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불평도 같은 맥락이다. 특정계층에게 집중된 정보망, 인맥, 돈줄은 기회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기회균등원칙’보다 더 진화된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대안으로 ‘기회균점주의’을 제안한다.
기회균등이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을 선언한 것이라면, 기회균점은 실천 중심의 구체적 실행원리라고 할 수 있다. 기회균등의 원칙은 현재의 제약조건을 그대로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범위의 기회를 보장하는 원칙이다. 이에 비해, 기회균점주의는 제약조건을 해결하거나 완화해서 그 테두리를 크게 키워 기회를 최대한 보장하는 미래지향적인 실천방안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기회균등은 현재의 여건이나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에 맞추어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런 소극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황이 갖고 있는 불평등 요소들을 조정·지원해서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지도록 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기회균점 정책’이다.
결론적으로 기회균점(機會均占) 정책은 ‘기회를 가능한 범위 내에서 국민 모두가 균등(均等)하게 점유(占有)하여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만드는 정부의 기조적 메타 정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을 하나 제안한다면, ‘(가칭)기회균점영향평가’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현재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규제영향평가 제도를 계승 발전시키는 의미에서, 이 제도를 대신하여 기회균점영향평가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법령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과정, 그리고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기회가 제한되는 일이 없게 하고, 기회가 균등하게 배분되도록 평가하여 기회균점주의를 현실화하는 방안이라 할 수 있겠다.
2) 왜 ‘기회균점주의’로 가야 하는가? 그 근거와 논리를 알아보자.
기회균점주의의 근거를 역사적 경험과 사실에서 찾아보자. Tony Blair 전 영국 총리는 그의 자서전 「토니 블레어의 여정」 에서 ‘기회의 평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94년 당시 존 스미스 당수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최연소 노동당 당수에 오른 블레어는, 시장 경제를 가로막던 노동당 당령을 삭제하는 데서 ‘제3의 길’을 열자.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국유화를 규정한 당령을 폐지하자고 강수를 둔다.
특히 그는 ‘노동당은 그동안 노동자 계급을 기념하려 했을 뿐, 이들을 중산층으로 만들고자 한 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일반 노동자들이 원했던 것은 바로 중산층이 되는 것이었음에도 노동당은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당시 노동당은 평등정책에 있어서도 ‘기회의 평등’이 아닌 ‘소득의 평등’이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다고 강하게 질타한다.
당시 블레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가져왔지만, 소득의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제약만을 만들어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노동당을 혁신하는 길을 걷게 된다.
다음은 Studwell이 주장하는 기회의 평등을 살펴보자. 그는 「아시아는 어떻게 움직이는가(How Asia Works)」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국, 일본, 대만이 다른 저개발국가와 다르게 성공했던 비결을 ①토지 재분배와 가족농 지원, ②잉여 수입의 저축과 제조업의 지원, ③국가주도의 금융정책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는 한국 등 3개국의 경우 ‘토지개혁’ 덕분에 이전에 없었던 자유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광복이후 토지 보유 농가가 10%에 불과했다. 그러나 토지개혁 이후 60년대 초에는 농가의 70%가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토지개혁의 결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지주가 없어졌고, 땅을 갖지 못한 농민도 거의 없어졌다. 그래서 모두가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Studwell에 따르면, 농업은 산업화 이전의 방대한 인구를 고용했고 자기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량을 극대화했다. 이를 통해서 한국은 제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틀도 마련했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은 전근대적인 지주·소작농 구조에 묶여 있어 산업화에 뒤처지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토지개혁을 통한 기회의 제공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긍정적인 효과와 그에 따른 경제적 성장은, 오늘날 한국이 안고 있는 경제문제와 불평등을 해결하는데 있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기회가 열려있는 나라, 누구든 실력을 갖추었다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다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연, 학연, 혈연 등 어떤 연줄도 통하지 않는 나라, 과정이 공정하고 결과도 공평한 나라, 이것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국가의 모습이다.
이런 나라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왜곡 없이 성장한다면, 그들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초과하여 달성하는 기적을 다시 한 번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제 기회균점주의의 논리적 근거를 탐색해보자. Malcolm Gladwell은 ‘Outlier’라는 책에서 성공한 사람(outlier)의 3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아웃라이어(outlier)는 보통사람의 능력 범위를 뛰어넘어 성공한 사람을 말한다. 통계학에서는 표본 중에 다른 대상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관측치를 아웃라이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빌려온 용어다.
Gladwell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Outlier)은 ①타고난 탁월한 ‘재능’과 ②남에게 주어지기 어려운 특별한 ‘기회’ ③적절한 시기에 주어지는 놀라운 ‘행운’이라는 3박자를 갖추어야 한다.
그는 어떤 사람도 단순히 탁월한 재능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고, 재능 이외에 기회와 행운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웃라이어가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실증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Gladwell의 주장에서 기회균점주의의 근거와 논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갑내기는 대개 1년을 기준으로 끊게 된다. 그 결과로 1월 1일에 태어난 사람은 그 해의 12월 31일에 태어난 사람까지 동갑내기로 살아가게 된다. 12개월 정도 차이가 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런 관행은 지금도 스포츠 선수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그리고 각급 학교에서 학생들을 선발하는 기준으로 적용된다.
Gladwell는 어느 누구도 별 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동갑내기 관행에서 기회의 불평등 요인을 찾아내는 현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회균점이 필요하다는 근거이다.
먼저 스포츠의 경우를 살펴보자. 캐나다의 하키 선수들의 팀을 편성하는 기준은 1월 1일이다. 그래서 1월 2일에 태어나 열 살이 되는 소년은 그해 말까지 만 나이로 열 살이 못되는 소년들과 함께 하키를 하게 된다. 성장기에 12개월이라는 기간은 신체발달에서 큰 차이를 낳는다는 점에서 기회의 불균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홉 살 나이를 대상으로 선수를 선발할 때에 몇 개월 더 성장한 어린이가 몸이 더 크고, 재능이 더 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조사한 결과를 보자. 캐나다의 엘리트 하키 선수팀을 분석한 결과 1∼3월에 출생한 선수가 40%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4∼6월 출생이 30%, 7∼9월 출생 20%, 10∼12월 출생은 10%에 불과했다.
이외에도 미국의 야구리그는 7월 31일을 기준으로 선발하기 때문에 메이저 리그에 출전한 선수들을 보면 8월에 태어난 선수가 유난히 많다고 한다. 영국의 경우는 9월 1일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프리미어 리그 선수 중에는 9∼11월에 태어난 선수가 많았다.
스포츠의 선발 관행은 교육현장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 Bedard와 Dhuey는 매 4년마다 전 세계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국제 수학·과학 경시대회의 성적을 그 아이들이 태어난 달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는 4학년 학생 중에서 일찍 태어난 학생들이 늦게 태어난 학생들에 비해서 4∼12% 포인트 정도 더 좋은 점수를 얻고 있었다.
Bedard와 Dhuey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도 실시하였다. 같은 연령대의 학생들을 빠른 달에 태어난 학생과 늦은 달에 태어난 학생으로 나누어 성적을 비교한 결과, 전자의 학생들이 후자의 학생들보다 약 11% 포인트 정도 높게 나타났다.
이런 기회 불균점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어떤 방안이 필요한가? 다시 말해서, 기회균점을 위한 대책은 무엇인가?
캐나다의 하키 팀의 경우, 태어난 달에 따라 세 개 정도의 하키리그를 만들어서 선수를 선발한다. 1월∼4월에 태어난 선수들의 리그, 5∼8월 출생자 리그, 9∼12월 출생자 리그 등 3개 리그를 운영한 후, 연말에 올스타를 선별하는 방식을 채택하면 기회는 골고루 균점될 것이다.
교육현장에서도 이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1∼4월생, 5∼8월생, 9∼12월생 단위로 학급을 편성하여 운영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방법을 채택하기 어렵다면, 덴마크처럼 국가차원에서 10살까지 아이들을 능력에 따라 반을 편성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자. 선택적으로 변별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자는 것이다. 몇 달 먼저 태어난 결과인 ‘숙달에 의해서 잘하는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위의 몇 가지 예를 통해서 기회균점주의의 근거와 논리를 살펴보았다. 이런 인식에 근거한 생각의 차이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아주 다른 삶의 결과를 낳게 할 것이다. 국민들이 생활 속에 실제로 느끼고 국민들의 삶에 스며드는 기회균점의 방안을 마련하는데, 우리는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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