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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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균점 공화국 1 - 우리 대한민국이 선진 강대국가로 갈 수 있는 초석은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이제 프레임을 바꾸자(3)

우리는 광복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 현대사의 초석은 ‘한국형 정치경제 혁명’임을 알아야 한다.

작성일 : 2024.11.01 08:11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우리 대한민국이 선진 강대국가로 갈 수 있는 초석은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이제 프레임을 바꾸자

 

세상의 진리를 하나만 말하라고 한다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런데 요즘 하나가 더 생겼다. 그 추가된 진리는 그 변화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 눈을 감고 철지난 이념에 얽매여 있어선 안 된다. 어리석은 자는 과거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고 한다. 이는 명분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이다.

요즘 우리 국민은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차고,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다. 정해진 기간 안에 자기가 맡은 일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에 멀리 보지 못하고, 정신을 차려서 멀리 보려고 해도 눈앞은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기업인, 정치인, 공무원도 예외는 아니다. 기업인은 분기별 매출에 신경을 써야하고 국내외의 경쟁압력 때문에 살아남기가 힘에 부치고 버겁기만 하다.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모든 기회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대의민주주의 체제하에서 항상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고, 공무원도 단기간에 성과를 내도록 압력을 받으면서 1년 단위로 업무계획을 세워 추진하다 보니 쫓기듯 여유가 없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눈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말했다 과거와 싸우지 말고 미래를 만들어라. 그러면 미래가 과거를 정리해줄 것이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한마디 보탠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 라고···

 

오늘날 세계는 미래 주도권을 놓고 진검 승부 중이다. 저성장을 탈출할 신성장 산업 쟁탈전은 눈물겹고 처절하기까지 하다. 자율 주행 자동차, 드론, 인공지능, 로봇 등 4차 기술혁신 전쟁도 치열하다. 이제 우리는 원대한 미래의 비전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라 하지 않았던가? 역사의 교훈도 미래를 준비해온 민족이 세계사의 주역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되돌아보면, 8·15 광복 이후 10년은 거센 바다처럼 파도가 굽이치는 역사 그 자체였다. 여기에 더해서 197080년대 눈부신 경제 발전 뒤편의 왜곡된 정치상황은, 당시의 젊은 세대들에게 해방 후 10년간의 굴곡진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주의와 민주주의를 활짝 꽃 피우고, 그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해방 후 10년 역사를 올바르게 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는 우리의 현대사를 열었던 우리 선대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초석을 마련한 정치경제 혁명 역군이었음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광복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 현대사의 초석은 한국형 정치경제 혁명임을 알아야 한다.

1789714일 성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점령함으로써 혁명의 불길은 높이 솟아오르게 된다. 그 불길은 전국으로 확산된다. 흉년으로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은 귀족의 저택을 습격하고 불을 지르기에 이른다. 이처럼 혁명이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자, 국민의회는 다음과 같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만천하에 공포한다.

1조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2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권을 보존하는데 있다.

3조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4조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만을 금지한다.

5조 모든 시민은 법의 제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이 선언문에 담긴 자유, 평등, 우애 등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은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후,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역사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권은 물론, 기회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음을 알려 준 혁명의 불꽃이 타오른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다.

그런데 한국형 정치경제 혁명이라는 생소한 말을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현대사의 발전에 단단한 초석이 되었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남들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싹을 틔워 이루어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헌법을 만들고, 농지개혁을 했던 선각자적인 민족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소작농에서 자영농으로 신분이 바뀌는 과정에서 농업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자립하여 자녀들을 교육시켜 과학기술과 산업을 일으킨 우리 선대들이 프랑스 시민혁명과 같은 정치경제 혁명의 역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우리는 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광복 이후 1948부터 1949년까지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헌법의 제정과 1949년의 농지개혁은 우리 현대사에 굳건한 디딤돌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1950536.25 전쟁은 비극 중의 비극이지만, 한편으로 사회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온 사건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전쟁을 통해서 봉건적 신분제의 잔재를 쓸어낸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시민혁명과 같은 정치경제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 의아해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도 현대에 들어서 1948년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이란 어엿한 국민국가를 세우고, 연이어 1949년 농지개혁을 하고, 19506.25 전쟁을 겪으면서 평등과 자유에 기반을 둔 부르조아적 시민사회가 형성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주대환 선생이 주장하는바와 궤를 같이 한다우리의 정치경제 혁명은 영국식의 명예혁명과 비슷한 점이 있고, 미국의 독립전쟁과 비슷한 6.25전쟁을 겪었다는 특징이 있다.

서구의 시민혁명과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우리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경제민주주의의 조항이 가미된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공화국으로서 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9193.1 운동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그리고 그 이후 계속된 독립투쟁은 우리 민족이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는 서구의 시민운동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독립운동의 역량이 1948헌법제정의 밑바탕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제헌 헌법을 통해 민주공화국으로 탄생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주권재민의 국가인 민주공화국의 틀이 갖추어졌으나, 통치자 중 일부는 이 숭고한 뜻을 저버려 망명길에 오르거나, 부하에게 시해당하거나, 탄핵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교과서를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정작 일부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묵살하여 나타난 결과들이다.

다시 1948년으로 돌아가자. 그해 510 선거를 통해서 198명의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 제정을 준비한다. 630일에는 헌법기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으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전문위원이었던 유진오는 국회를 양원제로,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로, 법률의 위헌심사권을 대법원에 부여하는 헌법초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논의과정에서 국회와 이승만의 타협에 의해 미국식의 대통령제 요소가 추가된다. 그 결과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제로서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제도, 정부의 법률제출권 및 예산편성권,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의 국회출석권 등 한국 특유의 헌법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제헌 헌법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우리 선대들이 독립운동 과정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자유와 평등을 헌법에 철저히 반영한 것이다. 민주국가의 자유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싶었던 여망이 헌법규정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제헌 헌법 제8조와 제9조부터 제14조까지 평등과 자유가 규정되어 있다.

(8)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일체 인정되지 아니하며 여하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하지 못한다. 훈장과 기타 영전의 수여는 오로지 그 받은 자의 영예에 한한 것이며 여하한 특권도 창설되지 아니한다.

(9)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금, 수색, 심문, 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 , 범죄의 현행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수사기관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후에 영장의 교부를 청구할 수 있다. 누구든지 체포, 구금을 받은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그 당부의 심사를 법원에 청구할 권리가 보장된다.

(10)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하며 주거의 침입 또는 수색을 받지 아니한다.

(11)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12)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

(13)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

(14)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저작자, 발명가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현대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 정신은 그 뿌리를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3조와 제4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3)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

(4) 대한민국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선서,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이처럼 19193·1 운동 직후인 411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도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현대국가의 건설을 약속하고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이 약속은 제헌 헌법을 통해서 지켜진다. 물론 그 약속의 명실상부한 완성은 다시 4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 ‘87체제이후에야 이루어지게 된다.

멀리는 1919년 임시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민족의 자유와 평등정신은 우리에게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제헌 헌법의 경제 조항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현행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인 제1192항이 제헌 헌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시민혁명의 꽃인 평등사상의 실천방안 중에 하나인 농지개혁을 명문화한 헌법 규정 제86조는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한다.

(84)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내에서 보장된다.

(86)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우리 제헌 헌법의 자유와 평등 정신을 살펴보았다. 혹자는 이 헌법을 유진오 선생이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을 베낀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하고, 1987년 체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장식헌법에 불과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제헌 헌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추구하기 시작한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광복 이후에 복잡하고 다양한 정파와 인물들의 꿈과 비전에 스며들어가서 공식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제헌 헌법이다.

결론적으로,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은 이와 같이 오래전부터 염원했던 자유와 평등 정신이 그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 정신의 실현과정은 서구의 시민혁명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토대가 된 농지개혁을 살펴보고, 그 시민혁명적 의미를 알아보자.

이승만 정부가 지주 등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 전격적으로 농지개혁을 단행하게 된 데에는 당시 중국의 공산화와 북한의 농지개혁 실시 등 외부 요인이 큰 압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북한도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남한 농민들의 농지개혁 요구가 점점 거세졌다.

농지개혁은, 이승만이 진보성향인 조봉암 농림부 장관에게 맡겨서 유상몰수·유상분배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농민들이 불하받은 농지에서 생산한 소출의 30%5년 동안 정부에 상환하면 자기 땅이 되도록 한 것이다. 30%의 상환이 부담스러워서 분배받은 땅을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보다 먼저 시행된 북한의 농지개혁은 무상몰수·무상분배였지만, 이는 남한의 방식보다 농민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지주들에게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해서 무상으로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했지만 국가에서 40%의 세금을 거두어 갔다. 40%의 세금은 일제강점기의 소작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사실 지주가 그냥 국가로 바뀐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해방 당시 농민의 85%가 소작농이었다. 국민의 약 70%가 농민이었음을 감안하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소작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민의 절반에게 소작농이라는 천형과도 같은 굴레를 벗게 해준 조치가 바로 농지개혁이었다. 농지개혁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에 하나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필리핀이나 멕시코는 토지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비해서 우리가 농지개혁에 성공한 이유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농업노동자와 소작농의 차이에 있다. 필리핀이나 멕시코의 농업노동자들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하였지만, 소작농은 남의 땅을 빌려서 자기책임 하에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지주에게 바쳤으니 스스로 농업경영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이러한 농업 경영능력이 농지개혁의 성공요인이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대한민국은 초기에 국민의 절반이상인 소작농을 모두 자영농으로 지위를 격상시켰다. 자영농이 된 농민은 대한미국의 국민으로 역할을 다하게 된다. 이는 대한민국이 자영농의 나라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 시민의 나라로 건국되었다는 의미이다. 자영농이 된 농민들은 열심히 일하고 자식들을 교육시켜 우리 대한민국에 자본주의 성공신화를 안겨주게 된다. 우리의 농지개혁은 그 자체가 서구의 자본주의적 토대 마련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농지개혁은 서구의 명예혁명 방식의 시민혁명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세 번째로 우리의 비극인 6.25 전쟁을 재해석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사회적 신분변혁의 의미를 살펴보자.

같은 민족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 전쟁은 3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끔찍한 전쟁이었다. 산업 시설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이처럼 6.25 사변은 한반도 전역을 할퀴고 삶의 터전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터에 남편을 보낸 미망인 그리고 부모와 자식을 잃은 가족들에게 통곡을 남긴 무서운 전쟁이었다.

6.25전쟁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같이 살아오던 민족이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싸운 전쟁이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몰린 사람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주저 없이 하게 된다. 아무리 고매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도 배고픔 앞에서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중에 사회변화는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분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6.25전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신분제의 잔재를 없애는 변혁을 가져온다.

피난통에 부산 국제시장 길거리에서 좌판을 펴고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가 과거에 지주였다고 하면서 시골에서 온 노비출신에게 너 반말 하지마라고 한들 그것이 통할 수 있었겠는가.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인데 양반 상놈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고향을 떠나서 뿔뿔이 흩어져서 사는 사람에게 과거 자기신분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죽음의 공포와 생존 욕망을 자기신분과 상관없이 똑 같이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봉권적 신분질서의 잔재를 완전히 일소한 것은 어쩌면 지옥에서 기적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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