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재임할 당시 조선의 지배층은 중국식 국제질서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터널 속에 빠져서 한자만을 고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자를 대신할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한글의 창제 작업을 비밀리에 할 수 밖에 없었다.
작성일 : 2024.10.09 11:31 수정일 : 2024.10.09 07:00 작성자 : 에디터 박세미
우리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감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도 한자를 쓰고 있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한글 덕택에 문명국가, 경제대국으로서 대접을 받으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지만, 그동안 한글의 연구는 세계사적 측면에서 보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우리만의 특수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자기만족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외국인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특수성도 세계사적인 보편성 틀 안에서 설명될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한글을 신성시하거나 세종대왕을 천재로 영웅시 할 수밖에 없다. 한글 창제에 대해서 외부적, 보편적 시각을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 문자의 발명은 중세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서양 국가들의 경우 라틴어라는 보편적 공통어에 대항하여 각 나라별로 고유의 민족어가 출현되면서 지역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다. 동양에서도 일본, 베트남, 한국이 상형문자인 한자를 통한 자국어 표기에 한계를 느끼고 자국 글자를 만들게 된다. 유럽에서는 주로 라틴 Alphabet을 통해 자국어를 표시하였지만, 동양은 한자를 변형하거나, 인도계통의 음운론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자국 문자를 발명한다. 우리 한글이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중앙아시아의 여진, 서하, 몽골, 만주 등 북방민족들이 한자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글자를 만들었다. 베트남은 쯔놈이라는 글자를 만들었고, 일본도 가나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아래의 글자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1.여진, 2.파스파, 3.베트남(쯔놈), 4.몽골, 5.서하, 6.만주, 7.일본문자 )
동아시아 국가의 Alphabet 역할을 하였던 한자는 뜻글자이면서 그림(상형)문자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 다른 지역, 다른 문화권에서 각각 다른 말을 사용하는 민족들의 말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한자가 표음문자였다면, 다시 말해, 서양의 라틴 Alphabet 같은 기호역할을 했다면, 동아시아의 각 민족이 자기 문자를 만들지 않고 한자를 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일찍이 농경사회에서 발전된 문명을 토대로 만들어진 한자어는 고립어의 문법구조를 갖는다. 중국 주변의 북방민족들은 교착어를 갖고 언어생활을 하면서 중국의 한자에 맞서서 투쟁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였다. 따라서 아시아의 문자를 분류하면 크게 한자와 한자를 변형한 문자, 인도 계통의 문자로 나눌 수 있다. 우리 한글은 인도 계통의 문자라는 주장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세종대왕이 재임할 당시 조선의 지배층은 중국식 국제질서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터널 속에 빠져서 한자만을 고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자를 대신할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한글의 창제 작업을 비밀리에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 산스크리트어(범어)에 밝은 승려인 신미, 수미 등 열 명의 학승과 수양대군, 정의공주 등 아들딸,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이 비밀리에 한글 발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 실록을 토대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글이라고 부르는 글자는 본래 명칭이 훈민정음이었다. 여기서 훈민정음을 편의상 한글로 표기한다.
- (1434년) 진주에서 김화라는 자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백성들과 직접적인 문자(책)를 통한 교화문제를 고민하였다.
- (1436년) 정부구조를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어 왕이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 (1437년) ‘앙부일구’라는 시계를 제작하면서 하층민에게 시간을 알릴 수 있는 시간표시법으로 동물그림을 활용하는 등 백성과의 소통방법을 고민하였다.
- (1438년) ‘흠경각’이라는 왕실 과학연구소를 통해 과학기술 개발성과를 크게 올렸다.
- (1443년 12월 30일) 한글을 창제하였다.
- (1444년 2월 16일) 한글을 써서 한자발음 사전인 ‘운회’를 번역하였다.
- (1444년 2월 20일) 최만리가 한글반대 상소를 올려 논쟁을 벌였다.
- (1445년 1월 7일) 몽고 Phagspa문자에 능통한 황찬이 요동에 귀양을 오게 되자, 신숙주 성삼문 등을 보내서 자문을 받았다.
- (1445년 4월 5일) 용비어천가를 한글로 지었다.
- (1446년 9월 29일)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반포하였다.
- (1446년 10월 10일) 의금부, 승정원의 공식문서를 한글로 작성토록 하였다.
- (1446년 11월 8일) 언문청을 설치하였다.
- (1446년 12월 26일) 문서담당 하급관리의 시험을 한글로 출제하였다.
- (1447년) 수양대군이 최초의 한글 산문책인 석보상절을 간행하였다.
- (1447년) 세종대왕이 친히 한글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 (1447년 9월) 동국정운을 완성하였다.
- (1448년 3원 28일) 사서를 한글로 번역할 것을 지시하셨다.
- (1449년 10월 5일) 정승을 비판하는 한글벽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위의 왕조실록의 기록 외에 남아있는 다른 역사기록도 있다.
먼저, 성현이 1520년대에 지은 ‘용재총화’에 한글 관련 기록인 ‘其字體依梵字爲之’가 있다. 즉 ‘글자체는 범자에 의지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영산김씨 세보’에, 세종대왕 곁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던 ‘신미대사’가 학사로 임명되어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범어(산스크리트어)의 자음과 모음체계를 설명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세 번째, ‘죽산안씨 대동보’의 ‘정의공주유사’조의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정의공주가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 변음토착(變音吐着) 문제를 해결하여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노비 수 백명을 내려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정의공주가 한문으로 표기할 수 없는 조사와 어미를 한글로 표기하여 토를 다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국지어음(國之語音)이 이호중국(異乎中國)ᄒᆞ야 여문자(與文字)로 불상유통(不相流通)ᄒᆞᆯᄊᆞㅣ’ 여기서 밑줄 친 것처럼 토를 달아 한문의 가독성을 높이는 방식이 ‘토씨’이다. 그런데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ᄒᆞ고 → ··爲古로, ··이라 → ··是羅라고 썼다. 훈독과 음독을 섞어서 썼던 것이다. 이처럼 爲, 是와 같이 훈독으로 토를 다는 것을 변음토착(變音吐着)이라고 하는데, 정의공주가 ‘爲와 是’를 ‘ᄒᆞ, 이’로 바꿔서 순수 한글로 토씨를 다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위와 같은 역사적인 기록인 사료에 입각해서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한글창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료인 ‘훈민정음 언해’와 ‘훈민정음 해례본’ 두 가지를 검토해 보자.
훈민정음 언해는 세조가 부친인 세종과 모친인 소헌왕후, 그리고 어려서 사망한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59년에 간행한 월인석보의 첫머리에 실려있다. 월인석보는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여,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달아 합편하여 간행한 것이다. 훈민정음 언해는 독자적으로 간행된 것이 아니고, 월인석보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자료가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 발명에 대한 유일한 사료였다. 그러나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 연구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는 세종의 서문과 예의(例義), 그리고 해례(解例), 정인지의 서문(소위 정인지 후서) 등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서문과 예의 부분은 ‘훈민정음 언해’에도 게재되어 있으나, ‘해례’부분은 해례본에만 실려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해례(解例)에는 제자해(制字解)를 비롯하여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등 해(解) 부분, 그리고 용자례(用字例)의 례(例) 부분으로 나누어서 씌여 있다. 해례에 훈민정음 제정의 이론적 근거와 한자의 표음과 우리말의 표기에 사용되는 정서법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용자례에서는 그 사용례를 모두 우리 고유어를 예로 들어서 우리말 표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훈민정음 언해에 수록된 세종임금이 직접 편찬한 부분이라는 의미의 어제(御製) 서문을 알아보자.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차로 어린백성이 니르고저 할배 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놈이 하니라. 내 이를 어여삐 녀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수비 니겨 날로 쓰매 편아케 하고저 할 따라미니라.
이 문장을 더 쉽게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말(음성)이 서로 맞지 않으니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마다 이것을 쉽게 익혀 편히 사용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의 ‘예의(例義)’에서는 각 글자의 소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ㄱ’ 부분을 알아보자.
ㄱᄂᆞᆫ 엄소리니 君자ㄷ字ᄍᆞᆼ 처엄 펴아나ᄂᆞᆫ 소리 ᄀᆞᄐᆞ니.
이처럼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훈민정음 각 글자의 소리가 어떠한가를 설명하는 내용만 실려 있다.
우리의 관심사인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해(制字解)’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제자해는 글자를 만든 원리, 글자를 만든 기준, 자음체계와 모음체계, 음의 형태 등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례본의 가치는 이 부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① 첫소리는 17자이다.
어금닛소리 ㄱ는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혓소리 ㄴ는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ㅋ는 ㄱ에 비해 소리가 조금 세므로 한 획을 더한 것이다. ···
② 가운뎃소리는 11자이다.
‘ㆍ’는 혀를 오그려서 소리는 깊게 내니 하늘이 자시(子時)에 열리는 것처럼 모양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보뜬 것이다.
‘ㅡ’는 혀를 조금 오므려서 소리는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니 땅이 축시(丑時)에 열림과 같은데 모양이 평평함은 땅을 본뜬 것이다.
‘ㅣ’는 혀를 오그리지 아니해서 소리는 얕게 내고 사람이 인시(寅時)에 태어남과 같으며 그 모양이 서 있는 것은 사람을 본떠 만든 것이다. ···
③ 초·중·종성이 합해서 글자를 이룬다.
- 초성은 일어나고 움직이는 뜻이 있으니 하늘의 일이요, 종성에는 그치고 멈춤이 있으니 땅의 일이며, 중성은 첫소리 나는 것을 이어받고 종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이어주니 사람의 일이다. 대개 글자의 소리의 요점은 가운뎃소리에 있으니, 초성과 종성이 합해져 소리를 이룸은 역시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기게 하는 것과 같지만, 그 재료를 이루도록 서로 돕는 것은 반드시 사람에게서 힘입는 것이다.
- 끝소리를 다시 첫소리로 쓰는 이치는, 움직여서 양이 된 것은 건(乾)이요, 고요해서 음인 것 또한 건(乾)이니, 건은 실제로 음과 양으로 나뉘어도 다스리지 않음이 없으니, 일원(一元)의 기운이 고루 흘러 막힘이 없고 사계절의 운행이 돌고 돌아 끝이 없으므로, 정(貞)에서 다시 원(元)이 되고 겨울에서 다시 봄이 되는 것처럼 초성이 다시 종성이 되는 것과 종성이 다시 초성이 되는 것이 역시 같은 뜻이다.
우리는 제자해(制字解)를 통해서 한글이 만들어진 원리는 무엇이고, 한글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제자해를 갖고 창제된 글자는 한글이 유일하고, 인류역사상 유일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 한글은 단어의 바탕이 되는 형태소가 아니라 소리나는 대로 음절을 표기하는 음성문자로 창제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바람이’가 아니라 ‘바라미’로 적었다. 그러나 현재는 말할 때에 음절 사이에 생기는 변화는 고려하지 않고 모든 단어와 받침을 기본 형태대로 적는다. 예를 들면, 닭은 ‘닥’으로 소리 나지만 ‘닭’으로 적고, 주어 자리에 올 때의 발음은 ‘달기’로 바뀌고 쓸 때에는 ‘닭이’로 적는다.
그런 연유로 ‘한국어에서 한국말과 한글은 일대일 대응한다’는 주장은 100% 옳은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개별 글자만을 볼 때 그렇다는 의미이다. 문장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다. 주변 자모음에 따라서 그 소리가 변한다.
한글을 처음 만들 당시에는 음성문자였다. 그렇지만 음성문자와 형태론적 음성문자(morpho-phonetic script)가 혼합되어 발전하였고, 오늘날 한글은 전적으로 형태론적 음성문자라고 할 수 있다.
한글 발명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다. 한글을 창제하는데 참고했던 문자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혹자는 우리 전통가옥의 문창살 모양을 보고 만들었다고 하나,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한글을 발명하는데 있어 다른 문자를 참고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역사 기록물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 나오는 ‘象形而字倣古篆’ 이다.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이고, 옛날의 전(篆)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문제는 ‘고전(古篆)’이 어떤 글자인가? 이다.
고전(古篆)이란 옛날 중국에서 사용하던 한자의 한 형태인 전자(篆字)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으나, 파스파 문자 모방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베르너 사세는 한글은 인도 음운론을 바탕으로 한국어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개발되었으며, 그 글자들은 온전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디자인되었다고 주장한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인도의 음운론은 기원전 1500년 경 베다(veda)라는 브라만교의 경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베다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즉 범어(梵語)로 쓰여 있다. 범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음은 발음부위에 따라 어금니 소리, 잇소리, 혓소리, 목구멍소리, 입술소리로 나누어지고, 발음 방법에 따라 입김없는 청음, 입김있는 청음, 입김없는 탁음, 입김있는 탁음, 비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를 다시 목구멍을 얼마나 여느냐에 따라 닫음, 약간 엶, 그리고 엶으로 나누어 총 34개로 정리하였다. 모음은 ‘아, 이, 우, 어, 오’를 포함하는 12개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인도식 음운론를 토대로 만들어진 문자는 티베트어(Tibetan)이다. 650년 경 티베트의 송찬감보 대왕 때, 톤미 아누이브가 인도에서 음운론을 배우고 돌아와 티베트어(서장문자)를 만들었다. 이 문자는 지금도 티베트에서 사용되고 있다. 티베트 문자의 발명을 계기로 아시아의 북방민족이 새 국가를 건설하면 제일 먼저 새 글자를 만드는 일을 관례처럼 반복하였다. 요의 거란문자, 금의 여진문자, 위구르 문자, 몽골의 파스파 문자 등이 그 예이다. 몽골은 칭기즈 칸 때에 위구르 문자를 빌려다가 몽골어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 후 중국 전역을 통일한 쿠빌라이 칸, 즉 원(元)의 세조는 즉위 초에 티베트 승려인 파스파에게 문자를 만들게 하고, 이를 반포하여 제국의 공용 글자로 삼게 된다. 이것이 파스파(Phags-pa) 문자이다.
위에서 인도 음운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티베트 문자와 파스파 문자를 알아보았다.
우리의 자음과 모음이 이들과 유사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아래의 문자들 간의 비교를 통해서 그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기록으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1445년에 세종대왕이 신숙주,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서 그곳에 귀양온 파스파 문자의 대가인 황찬에게 자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파스파 문자와 한글>

그렇지만, 세종대왕이 단순하게 파스파 문자만을 참고하여 한글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종대왕은 당대의 음운 서적을 통달하였고, 세종대왕과 그 연구자들은 인도의 음운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구어의 음운을 철저히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조음 지점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글자들의 그래픽 형태를 고안하였다. 그런 후에 파생된 글자들의 음성적인 특징을 고려하여 한 번에 하나의 획을 더하는 방식으로 글자를 디자인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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