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의 시대상황이 암울했고, 유교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가부장적인 예속에 찌들었던 우리의 어머니들이 또 다른 서낭당(성황당) 역할을 했던 예배당을 찾아가 신부님이나 목사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생의 의지와 활력을 되찾았을 것이다.
작성일 : 2024.09.06 10:58 수정일 : 2024.09.08 08:36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본질론과 관계론의 조화가 필요한 현대사회에서 기독교는 우리의 역동성을 되살리고 있는가? 를 알아보자.
기독교는 현재 한국에서 번성하는 종교다. 반대로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는 기독교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
한국은 한말에 선교사가 들어오기에 앞서 성경책이 먼저 들어와 읽히면서 기독교가 전파된 특이한 나라다. 이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우다. 대개 선교사가 먼저 들어와 피를 흘리고 핍박을 받은 끝에 결국 복음이 전파되는데,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성경책 말씀만으로 믿음의 불꽃이 일어나 퍼져나간 것은 세계사적으로 유일하다.
그만큼 조선말의 시대상황이 암울했고, 유교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가부장적인 예속에 찌들었던 우리의 어머니들이 또 다른 서낭당(성황당) 역할을 했던 예배당을 찾아가 신부님이나 목사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생의 의지와 활력을 되찾았을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아야 하는데, 성경은 관련 없는 일련의 이야기들로 아무렇게나 묶여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의 구조와 흐름을 소개하여 성경의 맥을 잡는 것으로 교리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유진소 목사에 따르면,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인간들의 죄 때문에 계속 망가져 가면서 그것을 회복시키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기록한다. 그 노력은 처음에는 전인류를 대상으로 하다가 점차 이스라엘, 유다 지파, 남은 자로 범위가 좁혀진다. 마지막에는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만 남는다.
신약은 구약의 결론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역을 하고 떠나신 후, 남은 사역을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과 교회가 성령 안에서 확장시켜 나가는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 한사람에서 시작된 이 복음은 12제자, 초대교회, 열방의 교회들로 점점 퍼져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요한 계시록에 가면 온 인류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를 정리하면 ‘온 인류→이스라엘→유다지파→남은 자→<예수 그리스도>→열두제자→초대교회→열방의 교회들→온 인류’로 복음과 사역이 전개된다.
예수 이전이 구약이고, 예수 이후가 신약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 이야기도 나오고, 노아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는 온 인류에 대한 스토리이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 바벨탑까지의 이야기가 온 인류를 대상으로 전개된다면,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서 한 민족만을 선택한다. 그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이 역사하는 대상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한 지파인 유다로 좁혀진다.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때 남북 분열이 일어나 11개 지파가 속했던 북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다. 결국 다윗의 직계인 유다 지파 하나만 남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역사하는 대상은 더 좁혀지게 된다.
그러던 중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유다 지파의 일부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여기서 에스겔, 다니엘, 느헤미아, 에스라, 에스더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온 유다 사람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남아 있던 사람들이 돌아와 성경의 중간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렇게 남은 자들로도 안 되니까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직접 한분을 보내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처럼 기원 전후에는 예수 한명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겠다. 구원의 복음은 예수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등장하고 이 교회들을 중심으로 전도가 확대된다. 마침내 열방 교회들의 범위가 점차 넓어져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열방의 교회 시기가 끝날 무렵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에리히 프롬의 평가를 소개하고, 현대철학자 니체의 주장과 원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먼저 프롬은 종교를 인본주의(관계론)적 종교와 권위주의(본질론)적 종교로 나누고 있다. 전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종교를 말한다. 후자는 이러한 잠재력을 오히려 손상시키고 억압하는 종교를 말한다. 이런 분석 틀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인본주의적 요소와 권위주의적 요소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본질론) 요소의 예로는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식의 교리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 인류의 원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믿으면서, 주말마다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보다 성숙해지고 보다 큰 사랑을 갖게 될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만이 천국에 가도록 약속받았다고 교만을 떨면서 다른 종교들을 배격하고 무비판적인 맹신에 빠지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다.
이에 반해 인본주의(관계론) 요소도 많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 하더라도 목마르고 허기에 지친 사람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가까운 사람이라는 주장이 여기에 속한다.
인본주의적 종교를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들은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찾는 지혜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니체는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power)을 강화하고 고양시키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길희성 교수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하고 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에 대한 보편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이를 단순히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신앙심을 판단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고 의심을 금기시하는 신앙은, 근본주의(본질주의)적 태도의 표상으로 기독교를 오히려 망치게 한다고 걱정한다.
이런 관행에서 벗어나려면 묻고, 의심하고, 생각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은 기적에 대한 믿음이 아닌, 예수가 추구한 가치를 실현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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