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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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3 - 조선시대의 유교 특히 성리학으로 인해 ‘불굴의 지성적 역동성’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은근과 끈기로 위축된다(5).

만주와 한반도에 모여든 여러 민족들이 서로 융합하면서 생겨난 시원적 민족원형을 ‘불굴의 신바람 역동성’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바람을 일으키는 역동성, 즉 융통성 있는 지혜와 유목민적인 역동성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성리학의 본질론적인 사유체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변형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작성일 : 2024.08.25 10:42 수정일 : 2024.08.25 11:20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조선시대의 유교 특히 성리학으로 인해 불굴의 지성적 역동성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은근과 끈기로 위축된다.

 

고려시대의 불굴의 지성적 역동은 조선시대에 와서 은근과 끈기로 변한다.

만주와 한반도에 모여든 여러 민족들이 서로 융합하면서 생겨난 시원적 민족원형을 불굴의 신바람 역동성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바람을 일으키는 역동성, 즉 융통성 있는 지혜와 유목민적인 역동성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성리학의 본질론적인 사유체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변형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계급주의적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폐쇄적인 본질주의를 표방하며 획일성과 배타성을 강요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중국을 숭배하며 모방하고, 성리학을 우리의 생활규범으로 받아들이는데 총력을 기우렸다.

성리학 규범을 체질화하면서 본질적인 사고에 빠지게 된다. 결국 조선은 경직되고,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사회로 전락하게 된다.

정리하면, 조선시대에 국가운영의 근본원리로 작용했던 성리학의 영향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원형이 가장 큰 시련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본질주의 사고에 빠져 어려운 상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로 동서양을 아울러 가장 지적이며 창의적인 임금인 세종대왕이 재임하던 때가 있었다.

15세기 세종시대는 성리학적 교조주의에 물들지 않았던 실용주의 시대였다.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였다. 일본의 이토 야마다 교수 등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에 따르면 1400-1450년의 주요 과학기술 업적은 한국 29, 중국 5, 일본 0, 동아시아 외 지역이 28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천민출신 장영실의 경우처럼 신분이동도 다른 시기보다 활발하였다. 이민족도 조선에 들어와 차별받지 않고 살았다. 모두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세종의 통치철학 덕분이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여기까지였다. 그 후의 조선은 정신적으로 본질주의에 입각한 성리학의 노예가 되어간다. 세종이 가고 점차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선사회는 빗장을 닫고 세계흐름에 눈을 감는 자폐증상을 보인다.

대내적으로도 유교적인 원리주의에 갇혀 사농공상의 계급주의에 얽매이게 되어 신분이동이 사라지게 되었다. 국가의 분위기가 개방적, 발전적, 진취적 성향보다는 폐쇄적, 고식적, 보수적 성향으로 흘러가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다양성과 포용력이 사라지고 유교 원리에만 의존하는 획일적인 사회로, 역동성이 사라지는 정체된 사회로 퇴보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까지 개방지향성이 그런대로 유지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세종시대를 끝으로 폐쇄성이 지속되었고 유교 성리학의 원리주의에 의해 경직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역동성에서 가장 많은 퇴보가 일어났다. 불행히도 우리의 역동성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적인 획일성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의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우리 민족의 기질을 은근과 끈기라고 한다. 이 주장은 조선시대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이후에 불굴의 의지인 끈기는 그대로 유지되지만, 역동성은 쇠퇴해서 그 자리를 은근성이 대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우리 민족의 시원적 원형질은 고대의불굴의 신바람 역동성〕→ 고려시대의불굴의 지성적 역동성〕→ 조선시대의은근과 끈기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본질론(本質論)에 뿌리를 둔유교는 우리의 역동성을 질식시켰다. 그 반대편에 선 관계론(關係論)입장의도교를 받아들였다면 사정은 달라졌을까?

중국에서 주나라가 망한 후 춘추전국 시대에는 기존의 생산양식, 통치질서와 신분구조 모두가 무너지게 된다. 이전 시대와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한다.

이런 혼란기에 많은 철학자들이 정치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통치 이데올로기를 내놓는데, 그 중심에 공자와 노자가 자리를 잡았다.

공자는 세상이 혼란스러운 이유를 인간성의 상실에서 찾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천하유도(天下有道)라고 표현한다.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만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본질은 ()’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공자사상의 핵심이다. 인은 친친(親親)’을 기본 내용으로 한다. 친한 사람을 더 친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공자의 생각을 소개한다. 섭공(葉公)이 자기 나라에서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면 아들이 그 사실을 증언할 정도로 정직(正直)하다고 말하자, 공자는 그것은 진정한 정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공자는 아버지는 도둑질한 자식을 숨겨주고 자식은 도둑질한 아버지를 숨겨주는 그 정서 안에서 비로소 진정한 정직이 자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論語·子路). 이처럼 인간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정서는 효이고, 그 효는 바로 인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공자의 유교는 인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인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 인은 다름 아닌 효로부터 출발한다. 효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다. 효는 윗사람이 아닌 아랫사람의 의무이다. 효와 더불어 중시되는 충도 효의 확장영역에 해당된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효에서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게 되는데 이는 가족 우선주의로 변질되게 된다.

효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를 정리하였다면, 아들들 간의 질서도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를 제()라고 한다. 형과 아우와의 관계로서 형에 대한 아우의 공경심을 요구한다.

조선시대에 이런 유교질서를 체질화했던 우리는 지금도 나이를 따지고 위아래를 가르는 서열주의관행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공자는 을 인간의 본질로 보고, 이를 인간의 존재근거로 삼는다. 이렇듯 공자의 이데올로기는 본질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본질론은 획일적인 틀 속에다 다양한 인간들을 짜맞추려고 하였다. 그 결과 일정한 틀이나 이념 또는 가치관에 맞지 않으면 폄하하거나 배제하거나 단죄하게 되는 부작용을 수반하게 된다.

이런 부작용이 조선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고 중국의 아우 역할을 자청했던 나라가 조선이 아니었던가? 철저하게 사회의 모든 규범과 관습을 유교, 엄밀히 말해 성리학적 이념에 맞추어 재정립했던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인들보다 더 중국적으로 살려고 했고, 더 중국식으로 생각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성과 철저함이 조선시대 유학의 특징이었다고 비판하는 견해가 많다. 여기서 단순성이란, 조선의 유학자들은 오로지 주자의 성리학만을 신봉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주자를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는 의미이다.

이런 단순함과 함께 유교를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철저함이 나타나게 된다. 그 이유는 주자의 학설을 절대적인 진리로 생각하여 그와 다른 이론을 개발할 염두조차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학술적인 면에서는 중국 수준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실천적인 면에서는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성리학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유교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조선의 생활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조선인들은 반드시 아들을 낳아 가계를 이어야 하고, 죽은 조상을 모시는 것을 산 사람을 봉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제사를 철저히 지냈다. 유교적인 절차에 따라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상복을 입어야 했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조상묘 옆에서 3년간 기거하는 것은 지구상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남녀 관계도 엄격하여 여자들은 가능하면 외출을 삼가도록 권하였고 길가에서 남녀가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 피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더 나아가 여성을 차별하는 악법인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법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본질론에 천착된 성리학에 의해서 운영된 조선은 경직된 사고체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쇠퇴하게 된 원인을 성리학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당시에 공자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노자의 도교가 있었다.

유교의 본질주의적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관계주의적 세계관이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노자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공자가 인간의 본성에서 도()를 찾았다면, 노자는 자연의 존재 양식과 운행 원칙에서 도를 찾았다.

노자는 세계를 대립면의 두 가지 계열, 즉 유()와 무()라는 범주로서 설명한다. 그는 유와 무가 서로 기대어 상호간에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그 대립 면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다고 하면서, 이를 유무상생(有無相生) 또는 유무공존(有無共存)이라고 하였다. 유는 무를 살려주고, 무는 유를 살려준다는 의미이다.

이 세계는 유()/(), ()/(), ()/(), ()/(), ()/() 등 두 계열의 대립면들이 그 반대편을 자신의 존재근거로 하면서 얽혀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도(). 이와 같이 이 세상에는 자신만의 본질을 근거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도교는 우리나라에서 성행하지 못했다. 조선인들이 도교와 유교를 대등하게 놓고 부족한 점을 서로 보완했어야 옳았다. , 처음 학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유교를 통해서 지식을 구축하여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노력을 하고, 유교의 사서삼경을 모두 마친 후에는 도교에 입각해서 해체론적으로 미래지향의 파괴적 창조노력을 병행하였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초적인 도덕성 함양 단계에서는 공자의 윤리관을 교육하고, 어느 정도의 이성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가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노자의 도교사상을 함께 교육하였다면 조선이 그토록 폐쇄적이고 경직된 나라로 전락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움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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