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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통일·외교 원로들과 오찬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 사진: 대통령실 제공 |
지난 8월 15일, 광복 제79주년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8ㆍ15 통일 독트린」을 발표했다. 정부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골간은 유지한 채 우리가 추구할 미래 통일상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추진 전략을 보완한것이라 밝혔지만, 그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일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오랫만에 통일문제가 언론의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음에도 건국절 논쟁에 가려 금방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형국이다. 건국절 논쟁이 정치적 이슈화 되면서 이번 발표가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받은 이유도 있지만, 최근 들어 사회적으로 통일에 대한 관심이 낮아진 상황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이 지난해 9월 26일에 발표한 2023년 통일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통일이 매우 필요하다’ 혹은 ‘약간 필요하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43.8%로 2007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을 보였다. 반면 ‘통일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혹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29.8%로 2007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이는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국민의 의식 저변을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건국절 논란을 염두에 둔 대통령의 정치적 수사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번 발표된 「8ㆍ15 통일 독트린」의 3대 추진 전략과 7대 추진방안을 보면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고 있는 부분들을 찾을 수 있다. 대북 차원의 통일 추진 전략에는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권 개선과 외부 세계의 정보 유입 강화가 포함되어 있다. 북한 주민들의 자유 통일에 대한 열망을 촉진하기 위해 부강하고 매력 넘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북한 주민, 특히 청년들이 잘 알게 해 통일을 동경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다차원적 노력 전개 ▲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라는 추진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북한을 자극하여 통일의 길을 더 멀게 하는 방안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1994년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제시한 통일방안이 「민족공동체통일방안(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이다. 이는 남북 간 화해협력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고 평화를 정착시킨 후 통일을 추구하는 점진적ㆍ단계적 통일방안으로, 화해ㆍ협력단계 → 남북연합단계 → 통일국가 완성단계의 3단계 접근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역대 정부는 화해ㆍ협력단계를 건너기 위해 경제협력 및 지원, 군사적 긴장 완화, 정전체제의 종식 등 명칭과 내용은 다르지만 상호주의와 기능주의에 입각한 대북ㆍ통일정책을 추진해 왔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역대 어떤 정부도 첫번째 단계를 완성하지 못했다.
8월 21일자 문화일보에 대통령실의 통일ㆍ외교 원로 오찬 간담회 참석을 앞둔 김형석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김교수는 "통일은 단순히 우리 정부와 북한 정권 둘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는 통일을 위한 북한 주민의 민족동질성 회복과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역대 우리정부가 견지해 온 통일정책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 딜레마는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동일 선상에 둔 접근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며, 우리의 통일정책이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 상황에서 북한 정권이 변화하지 않는 한 통일은 현실적으로 난망하다. 북한 정권이 변화하려면 북한사회의 내부 응력이 폭발하든지, 거부할 수 없는 외부의 압력이 작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의 통일정책은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을 무시한 채 북한 정권을 변화시키려 한 접근이었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일정책과 대북정책을 분리해야 한다. 북한 정권의 현실적인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정책은 대북정책 트랙으로, 우리의 내부적 통일준비와 국제사회의 협력은 통일정책 트랙으로 이원화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도 대북ㆍ통일 정책을 하나의 트랙으로 제시하고 있다. 담대한 구상이라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이렇게 한 트랙에 두다 보니 구체적인 정책과제들이 정합되지 못한 문제점이 있었다. 이번 「8ㆍ15 통일 독트린」도 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대북정책 차원에서 북한주민의 인권 개선과 정보접근권 확대 등을 여타의 외교적 노력과 병행함으로써 북한 정권의 변화가 가시화되면, 통일정책을 통해 그동안 준비해 온 내부적 준비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통합하여 통일과업을 완성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보기 드물게 선명한 국가정체성을 추구하는 현 정부의 현실주의적 정책을 보다 더 전략적인 차원에서 정렬(alignment)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