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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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3 - 불교는 무아론(無我論)으로 우리민족의 관계론적 ‘신바람’ 역동성을 ‘논리적·이성적’ 역동성으로 성숙시켰다(4).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즉 내가 없음을 깨달으면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관계론적 사유에서 볼 때 더 큰 의미가 있다. 불교를 통해서 우리의 관계론적 정신사에 논리적 지성이 쌓이게 된다.

작성일 : 2024.08.11 09:47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불교는 무아론(無我論)으로 우리민족의 관계론적 신바람역동성을 논리적·이성적역동성으로 성숙시켰다.

우리 민족은 왜 유교보다 불교에 먼저 심취하게 되었을까?

불교와 유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 전파되었다. 오히려 유교가 앞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먼저 받아들인 것은 불교였다. 이에 대해 한 사학자는 정복주의적인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유교보다는 불교가 더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정신사(精神史)관계론(삼국시대, 고려시대)〕→〔본질론(유교적 조선시대)〕→〔본질론과 관계론의 조화(현대)로 진행되었다고 순서를 매길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두 가지 종교가 전해진 삼국시대에는 관계론적인 불교가 우리 민족에게 더 친숙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불교가 먼저 국교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학계에서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계속 진화해 나갈 때, 그 궁극에는 불교가 있다는 주장을 들어본 적이 있다. 불교는 지구상의 다른 사상체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오하고 방대한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만큼이나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정교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종교를 찾아보기 힘들 듯하다.

불교에서 삼보(三寶)는 우주만유의 진리를 깨친 부처(), 부처가 설파한 모든 교법인 불경(), 부처의 교법을 믿고 따르며 수행하는 승려()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부처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타 종교와 비교할 때 불교보다 더 많은 경전을 가진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불교는 관계론적 사유의 표본이다.

이런 불교의 사상적인 근간은 무엇일까?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간략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살펴보자.

불교는 세상의 모든 일을 인연(因緣)의 결과로 본다. 여기서 은 원인을 말하고 은 그 원인이 구체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소를 말한다. 예를 들면 꽃은 인에 해당하는 꽃씨가, 연에 해당하는 흙과 공기 또는 수분을 만나 피었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른 요소로 변한다.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하여 꽃이 생겼다가 흩어지기 때문에 꽃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 된다. 변하지 않는 자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인연 가운데 상대적이고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인연과 관련된 잠언을 하나 소개하겠다.

간밤에 비가 살짝 내렸습니다. 봄비는 반갑습니다. 마른 먼지를 잠재우고 꽃과 나무에게 골고루 내려줍니다. 그런데 어떤 꽃은 예쁘게 피고 어떤 꽃은 피지 못합니다. 시절 인연입니다. 아직 필 인연이 아닌 겁니다. 아직 꽃 필 인연이 아닌 나 자신을 옆 꽃과 비교하지 마세요. 아직 내 차례가 아닐 뿐입니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즉 내가 없음을 깨달으면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관계론적 사유에서 볼 때 더 큰 의미가 있다. 불교를 통해서 우리의 관계론적 정신사에 논리적 지성이 쌓이게 된다.

불교의 세 가지 진리인 삼법인을 소개하면, 첫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내가 없고, 내가 없으니 라는 본질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되어있단 말인가? 그것은 인연이라는 관계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둘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이 세상의 어떤 행동이나 인간관계도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환()이라고 한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은 관계가 얽힘으로서 잠시 있는 것, 즉 가유(假有)에 불과하다고 본다.

셋째,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열반은 불어 끄는 것으로, 번뇌의 불에 바람을 불어서 끄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이상(理想)은 곧 열반적정이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고()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종교적 안심(安心)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불교의 무아론은 현대철학의 관계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세계에 이러한 불교의 관계론적 교리는 어떤 형태로 자리잡고 있는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이다. 세상만사는 항상 변하고, 세상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부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평범한 고유어, 즉 구어로 전파하라고 하면서 귀족적인 문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는 평등사회를 지향하였고 개방된 사유를 선호하였다. 불교가 갖는 관계론적 개방성으로 고려시대까지는 우리의 개방성과 역동성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신바람 역동성지성적 역동성으로 한 단계 성숙시킨다.

우리 민족은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본질론적사유 보다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관계론적사유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본질론에 기초한 경직성에 빠지지 않고, 불교적 자유분방한 관계론에서 나오는 역동성을 계속 유지하였다.

불교의 유입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근거로서 중국의 불교 유입과 그 변화를 소개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불경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 공자의 유교와 노자의 도교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 결과 도교에서는 도장경(道藏經)을 만들어 도교의 이론화가 이루어지고, 유교는 형이상학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이 이러하듯 우리 선조들도 불교의 심오한 교리와 승려의 가르침에 힘입어 지적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정리하면, 고대의 신바람 역동성이 이성적으로 성숙하여 지성적 역동성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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