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방식인 세계관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고 천차만별이겠지만, 이 시각들을 단순화하여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근대적인 시각과 현대적 철학의 사조로 나눌 수 있다. 전자를 본질론·실체론(本質論·實體論)이라 한다면, 후자는 관계론(關係論)이라 할 수 있다.
작성일 : 2024.07.08 09:41 수정일 : 2024.07.08 09:52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본질론과 관계론이 한국인의 사유세계를 분석할 프레임(frame)이 될 수 있을까?
영국 철학자 Whitehead는 서양의 근대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이원론적인 사유를 하였다. 그는 세계를 완벽한 세계(본체계)와 완벽하지 않은 세계(현상계)로 구분한다. 본체계인 ‘이데아’는 관념의 세계요, 사유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현상계는 모든 것이 변하는 유한한 세계이다.
서양 철학의 대부인 플라톤 철학을 계승한 근대 서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본질주의’ 철학이고 ‘실체론’적인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체와 본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체는 특정한 성질을 근거로 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이고, 그 특정한 성질을 본질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동물이 아닌 바로 인간이라는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본질이고 인간은 실체가 된다.
플라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Parmenides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쪼개지지 않은 하나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근대철학은 Parmenides가 말한 것처럼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여 본질과 실체를 가장 근원적으로 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근대철학자들은 이 실체론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인간의 이성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근대철학은 실체, 본질, 이성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사유체계라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도 없고, 환원할 수도 없는 두 가지의 실체를 상정한다. 그 하나는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정신과 물질의 본질은 무엇일까? 정신의 본질은 ‘사유(thinking: 思惟)’이고, 물질의 본질은 ‘연장(extending: 延長)’이라고 했다. 모든 물체는 공간의 일정 부분을 점유하면서 존재하는데, 이러한 물체의 성질이 곧 연장이다.
근대철학의 본질론은 헤겔철학에 들어서 정점에 오르게 되지만, 그를 정점으로 사변적인 관념론도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오로지 ‘정신’과 ‘이성’으로 해석하는 사조에 반대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modernism)의 실체론(본질론)으로 새로운 시대인 현대를 해석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일고, 마침내 포스트모던(post modernism)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철학자로는 Feuerbach를 선두로 Marx, Freud, Darwin, Nietzsche가 있다.
Feuerbach는 헤겔류의 이성(理性) 왕국으로서의 사유세계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계는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Darwin은 진화론을 주장하여 기존의 사유체계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Darwin 이전에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매우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동물과는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Darwin은 인간도 어류, 파충류, 포유류 단계를 거쳐 진화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인간과 동물을 하나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위의 두 학자의 주장으로 인해 서양 근대철학의 근원인 인간의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구도가 붕괴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현대철학의 서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이어서 현대 철학의 대부들이 주장한 관계론적 논리들을 살펴보자. Marx는 이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성인 물질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물질이라는 하부구조가 정신적인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Freud는 성적 충동(리비도)이 어린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무의식이야 말로 인간의 의식 활동을 지배하는 큰 힘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 내면에 자아(ego)라는 매우 견고하고 동요하지 않는 실체 대신에, 그 깊이를 알기 어렵고 성적(sex)인 의미가 강한 무의식이 그 심연에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하기에 이른다.
끝으로 현대철학자의 대명사인 Nietzsche는 세상에 고통이 사라질 날은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이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투쟁하고 갈등하는 데, 그 모습이야 말로 세상살이의 실상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살이가 이러한 모습이기에 우리는 정신력을 강화하고 고양해야만 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고 강화하고 싶은 충동을 ‘힘(power)에의 의지(권력에의 의지)’라고 역설한다.
니체는, 플라톤 철학이나 기독교와 같이, 피안(彼岸: 저 세상)을 영원불변하는 세계라고 보고, 차안(此岸: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는 무상하고 감성적인 세계라고 구분하는 데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는 영원불변한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생성·소멸하는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점에서 그는 플라톤과 기독교와 큰 차이를 보인다. 영원불변한 세계는 허구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현대철학의 흐름은 과학계에 양자물리학의 등장과도 맞물려 있는데, 그것은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변화가 멈추는 극점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구현되었다. 결론적으로 근대의 실체론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이제 관계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현대의 ‘관계론’적 접근은 우리의 사유 폭을 보다 넓혀 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이 세계의 움직임을 있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보아야하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관계론적 접근은 현대사회의 ICT기술과 인공지능(AI)의 발전과도 맥을 같이 한다. 관계론적인 세계관은 ‘해체론’적 사유방식과도 통한다.
‘구축(構築: construction)적 사고’는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게 하지만, ‘해체론(解體論: deconstruction)적 사고’는 단순한 지식보다 융통성 있는 지혜를 추구하게 한다. 개인의 지식 창고에서 필요 없는 것을 덜어냄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요약하면, 세상을 보는 방식인 세계관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고 천차만별이겠지만, 이 시각들을 단순화하여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근대적인 시각과 현대적 철학의 사조로 나눌 수 있다. 전자를 본질론·실체론(本質論·實體論)이라 한다면, 후자는 관계론(關係論)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본질론(실체론)은 가치론에 빠지기 쉽다고 경고한다. 가치지향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어떤 실체가 바로 그것 자체가 되도록 해주는 성질, 즉 존재근거이기 때문에 본질은 선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질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시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구분을 강요하고 그 구분에 따라 본질과 다른 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게 된다.
이에 비해, 관계론은 사실지향의 사유체계라 할 수 있다. 사실지향의 철학은 가치론이 갖는 폐쇄성을 비판하면서 열린 자세를 가질 것을 강조한다. 가능하면 마음속에 자리잡은 가치론적인 판단장치를 덜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아래의 두 문장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실체론과 관계론을 이해해 보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실체론·본질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뿌리 없는 부평초와 같다(관계론)
뒷 문장에 ‘뿌리가 없다’는 말은 본질이 없다는 것이고 존재근거 없이 여러 조건들의 연합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뜻이다. 존재근거가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관계론적 시각인 열린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본질론과 관계론의 프레임은 매우 유용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조화롭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도록 건전한 질서와 규범이 있어야 하고, 이와 함께 개개인이 창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본질론적인 측면에서 일정한 공동규범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공동체가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관계론적 창발성이 발휘되어야 한다.
현재 북한은 그들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경직성으로 인해 국가가 침체되고 있다. 이는 본질론적인 사유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도는 공통적인 규범보다는 개개인의 신앙을 더 중요시하는 다양성으로 인해 무질서의 극치를 보이는 것 같았다. 관계론적인 사유에 너무 치우쳐도 역시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정리 하자면, 이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감성은 야만적인 시대를 만들 가능성이 있고, 반대로 감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성은 맹목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국가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려면, 본질론과 관계론 간에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중에서 한쪽으로만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한국인의 정신적 DNA인 우리의 사유체제를 본질론과 관계론이라는 프레임으로 고대의 정신세계부터 근대의 신흥종교까지 시대 순서에 따라 그 변화상을 분석해 보자.
우리의 정신사(精神史)를 고대의〔관계론 우위 단계〕→ 조선시대의〔본질론 우위 단계〕→ 현대의〔본질론과 관계론의 조화 단계〕로 특징지을 수 있지 않을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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