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속에 페르시아 → 인도 → 남중국 → 한국(김해)를 거쳐 또 하나의 유전인자가 흘러들어 왔음을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신어상’의 분포를 살펴봄으로써 그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작성일 : 2024.05.26 11:39 수정일 : 2024.05.26 03:35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신어상(神魚像)에서 페르시아 민족의 유전인자를 찾을 수 있다.
2003년도와 2004년도에 걸쳐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세계 각 국에 수출되어 한류 드라마의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장금은 페르시아 지역의 이란에서 대히트를 쳤고, 실제로 TV에서 대장금이 방영되는 날엔 테헤란 시내가 한산할 정도였다.
왜 이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였을까? 그것은 고대 한국인의 옷 입는 스타일과 병을 치료하는 방식이 고대 이란인들의 풍습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 일까?
역사의 여명기에 우리와 페르시아(이란) 간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 우리 몸속에 페르시아 → 인도 → 남중국 → 한국(김해)를 거쳐 또 하나의 유전인자가 흘러들어 왔음을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신어상’의 분포를 살펴봄으로써 그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신어상이란 무엇인가? 신어신앙이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이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페르시아의 전설부터 살펴보자.
인류의 모든 병을 고치는 영약이 있었다. 그 약은 ‘고케레나’라고 부르는 거대한 나무의 열매였다. 그런데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악신이 이 나무의 뿌리를 파서 없애버리려고 두꺼비를 보냈지만 실패하였다. 알고 보니 이 나무뿌리를 지키는 ‘두 마리의 영험한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고기의 이름이 ‘가라(kara)’ 다.
이 전설에 나오는 ‘가라’라는 명칭은 가락국의 별칭인 가라(加羅)와 똑같은 발음이다. 페르시아에서 물고기의 명칭이었던 ‘가라’ 가 한국에 들어와서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음은 인도의 갠지스 강 중류의 사라유 강변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서, 기원전 6세기부터 3세기까지 번성한 고대국가 Kosala의 수도 아요디아의 전설이다.
인도 전역에 큰 홍수가 있었다. 모든 인간이 물에 떠내려가고 죽었는데 겨우 몇 사람만이 커다란 물고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 ‘마누’라는 사람이 있었고 마누의 70대 후손이 아요디아의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람왕이다. 람왕이 다스린 코살라(Kosala)국에서는 조상을 구해준 물고기, 즉 ‘마찌’를 신으로 삼았다.
위와 같은 신어신앙이 신어상(神魚像) 문양으로 표출되어 전해지고 있다. 신어상 문양은 페르시아, 인도, 중국 사천성 등의 사찰과 자동차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불행을 예방하는 민속 신앙의 표상이다. 이런 신어상이 김수로왕 왕릉 대문의 문설주 위에 그려져 있고, 경남 김해의 뒷산인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에도 그려져 있다. 은하사는 김수로왕의 왕비였던 허황옥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부산에 놀러가서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의 관음전의 문설주에 그려져 있는 신어상 문양을 직접 본적이 있다.
【참고】파키스탄 거리를 다니는 자동차에서 볼 수 있는 신어상 문양이다.

다음은 김수로왕릉 대문의 문설주에 그려진 신어상 문양이다.

그리고 남중국의 사천성에 보주라고 불렸던 안악현에서 전해오는 전설도 인도 아요디아의 전설과 같은 버전으로 회자되고 있다.
대가 끊어질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보주의 허씨족(許氏族)을 구해주었던 신령스러운 ‘물고기’가 있었다.
이러한 신어상의 분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메소포타미아 고대인들의 사유세계 속 신어사상이 신어상 문양으로 포장되어 인도와 남중국을 거쳐서 한국의 김해일대까지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증거들을 역사서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먼저, 삼국유사를 통해 가야의 김수로왕 왕비인 허황옥이 인도 아요디아 왕국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보주(지금의 사천성 안악현)를 경유하여 김해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48년 7월 27일 붉은 돛단배가 가락국 해안(지금의 김해)에 도착하여 20여명이 상륙하는데 그 중 한 여인이 김수로왕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 아요디아의 한자말)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 나이는 16세입니다.’ 이는 수로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은 무엇인가 허전하다. 인도와 한국 사이는 수만리 길인데 돛단배를 타고왔다는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해답의 단초는 김해에 있는 ‘허황옥의 능비’의 비문에서 찾을 수 있다. 비문에는 ‘가락국 수로왕비(駕洛國 首露王妃) 보주태후 허씨능(普州太后 許氏陵)’이라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허황옥은 보주에서 온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보주는 어디일까? 보주는 중국 사천성의 도시인 안악현(安岳懸)의 옛날 이름이다. 주나라부터 송나라까지 사용된 지명이다. 안악은 성도(成都)와 중경(中慶) 사이에 있는 내륙지방으로 양자강의 지류인 부강(部江)을 통해 성도, 중경, 상해와 연결되는 곳이다.
또 다른 기록인 후한서에 의하면 ‘서기 47년에 보주지방이 포함된 남군(南郡)에서 한나라의 수탈 정치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가 7천명의 토착인들이 체포되어 강하(江夏 : 현재의 武昌)로 강제이주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101년에도 봉기가 일어났다가 주동자가 항복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주동자의 신분이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그 이름은 허성(許聖)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허씨 성을 가진 사람이 보주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TV 다큐멘터리에서 조선 말에 하와이로 농업이민을 간 사람들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스스로를 조선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아요디아에서 보주지방으로 옮겨와서 몇 대를 살던 인도 사람들도 자신들을 아요디아(아유타국) 사람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후한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47년에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보주를 떠난 이들 중 일부가 가락국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47년에 반란사건으로 보주를 떠난 허황옥 일행이 48년에 가락국에 도착하였다고 후한서와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은, 신어상 문양이 페르시아에서 인도의 아요디아 지방에 이어 중국의 양쯔강 유역에 퍼졌고, 다시 황해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김해지방에도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가락국까지 전달된 신어사상, 그리고 허황옥의 인도에서 가락국까지 여정은, 우리 민족의 구성에 있어 또 다른 인자를 추가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북방민족, 남방민족, 잉카민족 외에도 페르시아 계통의 혈통이 우리 민족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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