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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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고려 삼별초가 있었네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기와에 새겨진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 :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

작성일 : 2024.05.04 04:39 수정일 : 2024.05.05 07:13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꽃피는 4, 34일의 일정으로 오키나와를 둘러보고 왔다. 일본 같으면서 일본 같지않은 일본인 듯 하면서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를 보고 왔다. 독특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오키나와를 느끼고 왔다.

오키나와가 18794월 일본에 복속되기 전까지 류큐열도에 1429년부터 류큐(琉球)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고, 일본, 한국의 영향을 받은 왕국이었다.

아열대 섬인 오키나와는 습하고 더운 날씨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체감 온도를 낮쳐 주었다.

첫째 날 비가 저벅저벅 오는 가운데 왕궁인 수리성(首里城)을 찾았다. 가이드는 설명했다. “수리성 기와지붕의 수막새, 그리고 류큐의 초기왕궁이자 성터인 우라소에 성(浦添城)의 기와와 와편이 한국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문양이다.”라고··· 고려와 관련된 기와와 와편들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다. 고려? 삼별초가 패전 후 오키나와로 이주? 사실일까?

고려 말 최씨 무신정권 시대 특수부대인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벌이다가 함락당했고 진도로 옮겨 용장산성에서 저항하다가 다시 패하자(12715) 제주도 항파두리로 퇴각해 마지막 항전을 벌인다. 그러나 몽골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였다. 삼별초의 공식기록은 끝이 났다(12734).

제주도 항전에서 패배한 삼별초는 그 지휘관 김통정은 자결하였고, 1300명의 병사만이 포로가 되었다. 진도에서 포로로 잡힌 병사가 만 명인데 비해 훨씬 적은 숫자다. 체포되지 않고 살아남은 그 많은 나머지 병사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키나와로 망명?

그 증거는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기와에 새겨진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라는 문구다.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 이 문구의 계유년은 언제일까? 고려 역사 500년 중 계유년은 1273, 1333, 1393년 인데, 1273년은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패망한 해이다.

제주에서 해류를 타고 780~800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오키나와 군도에 도달한 사례들이 역사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1802118일 흑산도 해역에서 조난당한 문순득이 10여일 만인 29일 오키나와에 표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별초가 오키나와에 이주하여 왕궁 건축을 주도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고고학적 발굴에서 밝혀지고 있다. 기왓장의 수막새 연꽃 문양 그리고 사다리꼴 모양에 물고기 뼈대 모양의 무늬가 그것이다.

 

< 오키나와 기와의 수막새 문양과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 문구를 통해

삼별초가 몽골에 패한 뒤 오키나와로 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오키나와 우라소에 시에서 나온 기와의 수막새 문양과 고려시대 진도의 기와 수막새 문양이 닮은 꼴이다.>

 

사흘째 되던 날 고즈넉한 민속 마을을 방문했다. 또 하나의 삼별초 흔적을 발견했다. 전통가옥을 둘러보다가 뒷마당에서 제주도식 똥돼지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제주도식으로 돼지를 기르고 있는 삼별초 병사의 옛날 모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씁쓸한 웃음끼를 머금고 겸연쩍게 미소짓는 병사의 모습에서부터 고국을 그리워하는 한이 서린 야릇한 표정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삼별초의 모습들이 내 머리 속을 스쳐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 고려여, ! 삼별초여. 여기 오키나와에서 다시 보는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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