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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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시리즈1 - 고인돌에서 한국인의 육체적 뿌리를 찾아 보자(1).

-고인돌을 만들었던 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벼농사를 짓는 농경문화가 시작-

작성일 : 2024.05.04 03:39 수정일 : 2024.05.26 11:37 작성자 : 정치에디터 박세미

먼저 한국인의 육체적 뿌리를 알아보자.

의사, 특히 한의사들은 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고 한다. 원형질을 알아야 그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저는 한국인이 갖는 시원적 원형질인 원형적 기질을 찾아내기 위해 긴 역사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그 기간은 2만년이 훌쩍 넘을 것 같다.

태초부터 한반도와 만주벌판에 인간이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단군이 왕국을 세우고 다스렸다는 기록이 신화형식으로 전해올 뿐이다. 그런데 고고학은 수만 년 전에 한반도와 만주벌판에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인종은 남방계의 농경민족, 북방계의 기마·유목민족 등 네 가지 이상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이 인종들이 교류하고 서로 섞이면서 인종학적으로 우수한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형성단계부터 글로벌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육체적인 뿌리다.

아프리카에서 현생인류가 탄생한 것은 2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사실 20만 년 전 한반도는 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5만년이 지났을 즈음에 한반도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 흔적이 보인다. 지금부터 4만 년 전쯤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보다는 빙하기가 끝나는 시점인 12000년 전부터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구촌 어디에서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였을까?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구호에 불과하다.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과학적인 유전자 분석, 고고학적 유물 분석 등을 통해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우리 민족의 구성에 대해서 우물안 개구리 식 접근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글로벌한 접근을 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저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해 왔다. 특별히 김병모 교수의 우리민족 뿌리에 관한 연구결과를 기본으로 삼아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한민족은 적어도 네 가지 민족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고인돌, 솟대, 돌하르방, 신어상으로 대표되는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유럽과 인도에서 흘러들어온 남방계의 농경민족, 둘째 시베리아에서 들어온 북방계의 기마·유목민족, 셋째 남미의 잉카에서 건너 온 돌하르방 민족, 넷째, 페르시아에서 온 신어사상을 가진 민족이다. 이 네 가지 인종이 한반도에 들어와 서로 어울려 살면서 섞이고 또 섞여 지금의 한민족을 이루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전국에 퍼져있는 고인돌에서 남방계 농경민족의 유전인자를 찾을 수 있다. 우리민족의 뿌리를 찾는 시금석 중 하나가 바로 고인돌이다.

한반도에는 고인돌이 3만개 이상 남아 있다. 전남화순, 전북고창, 경기도 강화, 경북경주, 황해도 등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수천 년 동안 각종 공사에 석재로 쓰이고 새마을 사업 등에 사용되어 소실되었을 터인데도 아직도 3만개 이상 남아 있다. 먼 옛날에는 전국에 얼마나 많은 고인돌이 분포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유심히 관찰해 오던 뜻있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거석문화협회를 결성하였고 그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20006월에 한국의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고인돌은 그리스어로 돌멘(dolmen)인데 돌 책상이라는 뜻이다. 사실 책상처럼 생긴 것도 있지만 납작한 바둑판같은 것도 있고 애초에 받침돌이 없는 것도 있어서 다양한 형태를 띤다. 이것은 고대인들의 무덤이다. 고인돌은 서유럽의 영국, 독일, 프랑스, 덴마크에서 많이 발견되고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과 흑해지방까지 퍼져있다. 또한 고인돌은 인도에서도 발견되고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일본의 큐슈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는 고인돌을 만들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현재 한국인과 같거나 비슷하게 생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고인돌 밑에서 한국 사람과 전혀 다른 유럽계 인종이 출토되었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실제로 이런 우리의 상식을 깬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1965년 충북 제천 황석리의 13호 고인돌에서 서양인 인골을 발굴한 것이다. 인골의 주인은 신장이 170센치 정도이고 40대 남자였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방식으로 계산해보니 그가 생존했던 기간이 기원전 410년 전후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두개골은 옆으로 넓게 퍼진 한국인 두개골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머리통이 앞뒤로 튀어나온 모양인 짱구형이었다.

이 황석리인을 비롯하여 한반도에 퍼져 있는 수많은 고인돌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 현재의 한국 사람과 다른 인종인 서양인일 가능성이 크다면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밝혀야 할 과제이다.

얼굴 연구가인 조용진 교수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황석리인을 복원하였는데 그 모습이 아래와 같이 서양인(caucasoid)에 가깝다. 조용진에 의하면 황석리인처럼 생긴 사람들이 지금도 제천, 원주, 충주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한국인에게는 백인 계열의 코카서스(caucasus)인종의 피가 섞여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다. 한국인의 체격이 일본인보다 크며 머리카락의 색깔은 중국, 일본인보다 덜 검고 얕은 갈색을 띤 사람이 많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출처: wikipedia>
 

41년 제천 황석리 13호 고인돌에서 사상 처음으로 발견된 완벽한 형태의 인골(좌)과 조용진 교수가 복원한

황석리 인골 주인공 얼굴. 서양인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참고황석리 13호 인골(人骨) 싸고 인종논쟁치열

41년전 발견된 황석리 13호 인골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발굴 당시 발굴단은 서울대 의대(나세진·장신요 박사팀)에 인골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분석팀은 당시 인골의 신장이 174cm 정도라면서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을 냈다.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이라면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인 점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김병모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은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두개장폭지수는 한국인의 경우 100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70~73 사이라면서 황석리 인골의 지수(66.3)로 보아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BC 1700년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BC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놀라운 것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조용진 한서대 교수가 이 인골의 두개골을 복원한 결과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고, 이가 큰 북방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이하 생략)

우리 역사의 여명기에 생겨난 고인돌을 둘러싼 이 미스터리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

고인돌이 먼저 유럽에서 인도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에 의하면, 당초에 유럽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던 과도기인 기원전 2500년 대 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800년 정도가 지난 기원전 1700년경에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히타이트(hittite) 민족이 철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무기로 만들어서 주변지역을 정복해나가자 이에 겁을 먹은 아리아(aryan)족이 인도 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고인돌 문화가 유럽에서 인도로 전파되었다. 세계 문화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다.

저는 영국에서 고인돌을 본적이 있다. 영국 솔즈베리(Salisbury) 지방은 산업 혁명기에도 철도가 연결되지 않아 옛 모습이 그대로 보전된 살아있는 민속촌이다. 여기에 고인돌의 진수인 스톤헨지가 있었다.

프랑스 Esse지방에서도 요정의 돌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고인돌이 발견된다. 탁자식 고인돌들을 여러 개 붙여놓은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고인돌은 단독 주택 모양이라면, 프랑스의 Esse지역의 고인돌은 연립주택과 같은 형태라는 이야기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 영국군 공병대가 작성한 인도 지도에 수많은 고인돌이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제주도의 고인돌처럼 10여개의 받침돌이 한 개의 커다란 뚜껑돌을 받치고 있는 것부터 고인돌 주위에 돌 울타리가 에워싸고 있는 것 등 다양한 고인돌이 발견된다.

한편,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네덜란드 사람 반 델 후프라는 수마트라에서 고인돌을 발견하였고, 김병모 교수도 자바섬 창광 마을에서 고인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연대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기원전 5세기 전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인도의 고인돌이 이보다 몇 세기 앞서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인도에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거쳐 한반도의 전역과 일본의 큐슈 등으로 지석묘가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제 눈을 돌려 언어학 연구를 통해서 인도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고인돌 전파를 확인해 보자. 언어학 측면에서 중국어가 한국어에 미친 영향은 중세 이후에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한자를 차용하였음에도, 중국어는 한국어의 골간을 형성하는 과정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중국어가 낱말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고립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또는 어간에 조사나 어미가 결합되어 그 의미가 형성되는 교착어이다.

이런 차이는 남방에서 온 농경민족과 북방에서 온 유목민족이 합쳐져서 우리 민족을 이룬데서 기인한다. 한국어가 인도의 드라비다어의 영향과 북방의 요하강 유역 언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인도의 드라비다어 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인도의 드라비다어는 힌두어에 비해 그 역사가 길고 오래된 토착어인데 타밀어, 벵골어, 우루두어 등 수십 가지로 나뉘어진다.

이 드라비다어와 한국어 간의 긴밀한 관계를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에서 Clipinger라는 대학원생이 언어학 박사논문을 통해서 밝혀내게 된다. Clipinger(현재 Marryland대학 언어학 교수로 재직)가 밝혀낸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사이의 농사관련 어휘들이 똑같다는 사실을 아래의 비교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드라비다어의 단어들 중에서 쌀, , 가래, , 메뚜기라는 말이 한국어와 똑같이 발음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사람 신체부분의 명칭, 친족의 호칭 등 한국어와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인도의 드라비다어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지금까지 우리의 언어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과 직접 관련은 적지만 참고할 단어들을 소개한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한국에 들어온 인도말이다. 밥하는 곳인 아궁이는 인도의 최고 경전인 리그베다(Rig-Veda)등의 원시 경전에서 불의 신을 통칭하던 아그니신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건달이라는 말도 노래와 춤을 잘하는 신인 간다르바’(중국에서 건달바로 번역)에서 유래되었다. 이처럼 우리 문화는 인도와 직간접적으로 교류하면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고인돌을 만드는 풍속을 가진 사람들이 멀리 서유럽에서 인도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초기 벼농사 기술과 함께 난생신화를 갖고 들어왔음을 살펴보자.

동아시아에서 고인돌이 유행하던 기간은 탄소연대 결정법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약 1천 년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한반도는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이전하는 시기였다. 고조선이 세력을 결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때에 한반도 남쪽에 살던 주민들에게 고인돌 민족이 벼농사 기술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조, 기장, 도토리를 먹던 단계에서 쌀을 먹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벼농사가 유리한 곳은 한반도에서는 전라도 등 남부지방이고 중국의 경우는 황해 연안, 일본의 경우에도 가장 따뜻한 규슈 지역인데, 이런 지역에서만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고인돌과 벼농사 간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유목민족들이 살고 있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대초원, 중국의 내륙 깊숙한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 지배층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신화적인 출생 설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고인돌을 전파한 남방계의 농경민족들이 자기들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구사했던 스토리텔링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스토리텔링은 난생신화방식이었다. 자기 시조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다. 고인돌 문화와 난생신화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출생 설화가 있다. 양산(楊山) 기슭 나정이라는 우물 부근에 여섯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번갯불 같은 것이 하늘에서 땅에 떨어져 그곳으로 가 보았더니 보라빛의 큰 이 있었고,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한다.

같은 책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설화에서도 가라(加羅)의 여러 마을 수장들이 구지봉(龜旨峯)에 모여 영신제를 지내고 있을 때 보라빛 줄에 매달린 황금의 상자가 내려왔는데, 그 속에 들어 있는 ‘6개의 황금알에서 수로왕을 비롯한 6명의 시조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출생 설화에서도, 유화부인이 큰 을 낳고 그 알에서 왕이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난생신화가 인도, 동남아시아에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인도의 베다신화에서 최고신의 하나인 브라만도 물위에 떠있는 황금의 알 나라야나에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족의 신화도 난생신화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알이 신비스런 생명체임을 인식한 탓인지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는 특별히 많다.

여기서 난생신화가 전해오는 지역과 고인돌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이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고인돌 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난생신화를 설파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살펴본 것을 종합해 보자. 고인돌 문화 지역과 벼농사를 짓는 농경지역, 그리고 난생신화가 전해오는 지역이 거의 일치한다. 고인돌을 만들었던 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벼농사를 짓는 농경문화가 시작되었고, 그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난생신화를 만들어서 유포하였을 것이라는 역사적인 추론이 가능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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